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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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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같은 들깨밭이 물들면

<단풍들이 들깻잎 장아찌> 할머니와 둘이 이틀 온종일 단풍 같은 손으로 딴
단풍들이 깻잎, 짚을 묶어 소금물에 누르고 막장에 담고 양념장에 담가 1년 내내 두고 먹네
등록 2014-11-15 12:13 수정 2020-05-03 04:27

마을 야산 위에 있는 배수가 잘되는 못둔지 들깨밭은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장정 손바닥같이 큰 깻잎이 달린 깨밭은 어른들 가슴이 넘치고 아이들 키가 묻히도록 잘되었습니다. 희끗희끗한 깨꽃이 핀 초록 깨밭은 바람이 불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시름하게 쓸렸다 이쪽으로 쓸렸다 하면서 햇빛 비치는 강물같이 시원한 기쁨을 줍니다. 올해는 들깨 모를 붓고 모종을 할 때부터 순조롭더니 깨밭이 황금색으로 곱게 단풍이 들었습니다. 어떤 해는 깨가 잘됐는데도 깻잎 뒷면에 뭔가 뻘긋뻘긋한 것이 잔뜩 나서 먹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서리가 내리기 전 하루이틀 품 들여 단풍들이 깻잎을 뜯어 1년 동안 두고두고 먹습니다. 깻잎을 깨가 여물기 전에 따면 깨가 잘 안 여뭅니다. 너무 늦게 따면 깻잎이 다 떨어지고 깨알이 빠져 도망갑니다. 깨밭을 잘 살펴봐서 잎이 단풍이 들고 투명하고 얇아지는, 마르기 전 때를 잘 맞춰 따야 맛있습니다.

김송은

김송은

할머니와 둘이 하루 종일 깨밭 고랑 사이로 깨가 떨어지거나 줄기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잘 흩치고 다니며 깻잎을 따 짚으로 묶습니다. 짚단을 풀어 이삭 쪽을 쥐고 흔들며 짚북데기를 훑어내려 만든 짚 끈을 위를 묶어 다래끼 줄에 차고 다니며 씁니다. 깻잎을 오른손으로 뜯어 왼손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손에 가득 넘치려 하면 두 손으로 둥글게 뭉쳐 지푸라기로 두 번 돌려 꼭 묶습니다. 삶거나 소금에 절이면 줄어들어 빠질 염려가 있어서입니다. 다래끼가 가득 차면 자루에 옮겨 담습니다. 그렇게 저녁때까지 땁니다.

큰 항아리에 깻잎을 7부쯤 차곡차곡 담고 소금물을 아주 짭짤하게 풀어 붓고 위에 짚 또아리를 올려 납작한 강돌로 눌러놓습니다. 잘 삭으면 헹궈서 쌈을 싸먹기도 하고 들기름 양념해 밥솥에 얹어 쪄먹기도 합니다. 큰 장뚜가리(뚝배기)로 한가득 양념해 솥에 물 붓고 중탕할 때는 밥도 먹기 전에 맛있는 냄새가 나서 코를 발름발름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십니다.

두 번째 날은 깻잎을 묶지 않고 다래끼에 차곡차곡 뜯어 담아 가득 차면 자루에 옮겨 담습니다. 오후가 되니 몸이 뒤틀리고 지루합니다. 할머니보고 그만 뜯자고 하니 세상에 무슨 일을 하든 고비를 잘 넘겨야 된다고 하십니다. 해가 질 때까지 뜯었더니 어제보다 훨씬 많이 뜯었습니다.

내일 할 걸 남겨두고 일부는 막장에 담급니다(사진). 꼭지 쪽을 쥐고 물에 흔들어 서너 번 씻고 마지막에 소금을 간간하게 풀어 잠시 두었다 건져냅니다. 물기가 빠지면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으며 사이사이 막장을 올립니다. 몇 달이 지나 노랗게 삭아도 깻잎 향이 그대로 납니다. 여름 장마철 반찬 없을 때 찬밥에 물 말아 수저에 얹어 먹으면 입안이 깔끔하고 밥 잘 먹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저녁에 등잔불 밑에 가족이 둘러앉아 남은 깻잎을 짚으로 묶으며 지난해 깨밭에서 일어났던 일을 얘기합니다. 읍내 친척들이 깻잎을 따가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더니 일곱 명이나 와서 조심성 없이 깨밭을 휘젓고 다녀 깨가 다 부러졌습니다. 응달 쪽 연한 깨송이는 부각을 해먹는다고 한 다래끼씩 땄답니다. 깨밭도 돌아볼 겸 할머니가 점심 먹으라고 부르러 가셨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들이냐. 어떻게 주인이 먹어도 보기 전에 이렇게 많이 뜯을 수가 있나, 하니 채신(처신)없는 젊은 아주머니가 바다같이 큰 깨밭에서 그까짓 깨송이 한 다래끼 땄다고 큰일 난 것처럼 군다고 고함치며 덤벼들었답니다. 농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들만 나무랄 일도 아닌 것 같아 다시는 밭에 사람들을 들여놓지 말고 좀 많이 해서 나눠먹기로 했습니다.

밤에 묶은 깻잎은 아침에 살짝 삶아서 물에 잘 헹궈 큰 삼베 보자기에 싸서 떡암반에 올려놓고 물기를 빼느라 탯돌로 누르고 그 위에 맷돌과 다듬잇돌도 올립니다. 김장할 때처럼 하루 품 들여 양념을 장만합니다. 조선간장에 물 붓고 소금·설탕도 약간 넣고 북어 대가리 넣고 아끼던 멸치와 다시마 넣고 무와 대파 넣고 한 솥 짜지 않게 달여 식혀놓습니다. 파도 한 아름 뽑아다 손질해 송송 썰고 마늘도 까서 쇠절구에 빻고 참깨도 볶아 고춧가루 넣고 양념장을 큰 버럭지(함지)로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먹을 깻잎 양념엔 들기름도 넣습니다.

한 사람은 짚을 풀어내고 머리 쪽을 쥐고 흔들어 장독소래기같이 넓은 그릇에 깻잎을 여러 장씩 뚝뚝 뜯어 쭉 펴놓습니다. 한 사람은 국자로 양념장을 퍼 빨리빨리 찔끔찔끔 부어 재워서 큰항아리에 옮겨 담습니다. 두고두고 먹어도 맛있지만 첫날 손바닥같이 큰 깻잎을 밥 덮어 먹을 때가 제일 맛있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늦게까지 깻잎 항아리를 닦고 또 닦으며 누구누구네 나눠줄까 손가락을 꼽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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