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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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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냐나, 그 쪽빛 바다

시칠리아에서도 배로 30분 들어가는 섬에서의 3박4일…
해파리와 차별적 눈빛과 에메랄드 바다가 있는 곳
등록 2014-07-26 14:55 수정 2020-05-03 04:27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옆 우도에 다녀온 거야.”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주로 머물렀던 파비냐나에 대해 사람들이 물으면, 그렇게 답했다. 머나먼 이탈리아 아득한 시칠리아, 거기서도 배를 타고 30분 들어간 파비냐나에 3박4일을 머물렀다.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지낸 2주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파비냐나섬이었다. 서울에서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피렌체를 거쳐 비로소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도착했다. 7월6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찾아간 호텔은 지붕에 창문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마피아의 고향이었지만, 동굴 같은 방에서 마법 같은 숙면을 취했다.

한국의 제주도이자 전라도

“시칠리아는 제주도이자 전라도라고 생각하면 돼.” 누군가 시칠리아에 대해 물으면 그렇게 답했다. 반도국가 이탈리아의 남단에 위치한 섬이자, 전라도처럼 음식이 맛있다는 곳이란 뜻이다. 북쪽으로 갈수록 부유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가난하다는 이탈리아반도의 남단에서 다시 해협을 건너야 이르는 시칠리아. 물가가 싸고 음식이 맛있고 풍광도 멋있고 유적도 있고 바다도 좋다. 마흔셋의 아들이 칠순의 노모와 유럽 여행에서 굳이 그곳을 택한 이유다. ‘아,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땅이기도 하지’라는 명분은 그 다음다음에 왔다.

그 좋은 동남아를 버리고 ‘무엇 때문에’ 유럽에 왔는지, 여행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던 이스탄불 보스포루스의 전망도, 하루에 세끼를 주는 안탈리아 리조트의 바다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피렌체의 두오모도, 타이의 맛있는 솜땀과 필리핀 엘니도의 환상적인 물빛이 선물한 감동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썰렁한 모자의 여행에 아들이 던지는 유일한 농담은, “도대체 여기에 왜 온 걸까요?”

7월7일, 팔레르모에서 트라파니로 가는 버스에서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 이 풍경을 보려고 여기에 왔구나.’ 왼쪽으로 메마른 돌산이 외계의 풍경처럼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해변에 그림같이 자리잡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그래 여기는 영화 를 찍었던 시칠리아 아니던가. ‘여기도 이렇게 좋은데, 파비냐나는 얼마나 좋겠어?!’ 칠순의 가족 관광객을 모시는 여행 가이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물 따라 다닌 지 10여 년. 항구에 내리면 여기 바다가 어떻구나 대충 감이 온다. 트라파니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내린 파비냐나의 바닷빛은 기대에 비해 평범했다. 서너 개밖에 없는 한국어 블로그 후기에서 보았던 그 물빛은 아니었다. 그토록 시리던 청록색은 어디에 갔을까? 은근히 짜증이 나는데 예약한 숙소의 차량은 항구에 픽업도 나오지 않았다.

첫날은 일단 여행자 마을에서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돌과 모래가 섞인 해변은 평범했지만, 그래도 바다수영을 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의 모범을 따라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오리발을 끼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항구가 지척인데도 바닷물이 깨끗했다. 그렇게 노닐다 해변으로 돌아오는데, 물귀신이 잡아채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해파리, 해파리에 쏘인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속으로 되뇌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팔을 보더니 이탈리아인 모녀가 “메두사! 메두사!” 외쳤다(해파리를 이탈리아에서는 메두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밀었다. 딸은 “암모니아”라고 말했다. 그들이 내민 암모니아수로 응급처치를 하고 그들이 알려준 방향으로 “파머시”를 찾아갔다.

자본의 법칙을 벗어난 평등한 해변

해파리에 쏘인 상처는 하루가 지나니 부기가 가라앉았다. 어떻게 온 곳인데, 다음날 쉬지 않고 탐험에 나섰다. 파비냐나의 해변은 평등하다. 그림 같은 모래해변, 환상적인 바닷빛이 있는 곳에는 고가의 리조트가 자리잡기 마련이다. 그것이 자본의 법칙이다. 그러나 파비냐나의 지형은 그런 독점을 가로막는다. 바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절벽부터 바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 위에 숙소를 지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파비냐나의 여행자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을 따라 널린 해변을 찾는다.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지 못하니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첫 번째로 찾아간 해변은 물빛도 놀기도 좋다는 ‘칼라아추라’(Cala Azzurra), 번역하면 ‘푸른 만’이다.

누군가 지중해의 한 점이라는 몰타에서 이런 후기를 남겼다. “푸른빛이 무척 아름답지만, 이미 파비냐나의 바다를 봤으니 감동이 덜했다.” 이것은 파비냐나로의 여행을 정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칼라아추라의 물빛은 타이의 꼬끄라단, 인도네시아의 길리에서 보았던 아름다움에 비하면 평범했다. 게다가 바위가 천지라 땡볕을 피할 곳도 적었다. 바다만 보면 “좋다, 좋다”를 연발하는 노모의 입에서 선뜻 칭찬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칠순의 그분은 몰디브 여행도 다녀온 해변의 여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극장을 지었다. 파비냐나의 밤은 아늑하고 흥겹다. 여행자 거리에서 월드컵 준결승전을 지켜보는 사람들. 타오르미나 정상에서는 영화 〈그랑블루〉를 찍었던 해변이 내려다보인다(왼쪽부터 시계방향).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극장을 지었다. 파비냐나의 밤은 아늑하고 흥겹다. 여행자 거리에서 월드컵 준결승전을 지켜보는 사람들. 타오르미나 정상에서는 영화 〈그랑블루〉를 찍었던 해변이 내려다보인다(왼쪽부터 시계방향).

잠시, 어머니를 바위 그늘에 두고 바다로 들어갔다. 역시나 메두사의 바다였다. 전날의 사고로 트라우마도 생겼다. 잠시 들어갔다 나오니 그분은 웃으며 말했다. “3시간씩 바다에 있는 아들이 웬일이냐.” 아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잠깐 다른 해변에 갔다올게.” 말을 남기고 지도를 보면서 걸었다. 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부에마리노’(Bue Marino)로 향했다. 지중해의 마른 먼지가 날리는 길을 걸어가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이들의 이상하게 보는 눈길이 스쳤다. 길가의 농가를 지나는데,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양들도 나를 쳐다봤다. 30분을 걸어서 마법 같은 푸른빛의 바다에 이르렀다. 나중에 어머니는 “짙은 옥색”이라 하고 아들은 “에메랄드”라고 했던 그 바다였다. 부에마리노에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굴도 있었다.

서둘러 칼라아추라로 돌아왔다. 땡볕에 고생하고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는 “바다에 들어가니 시원해” 하면서 해맑은 얼굴로 아들을 맞았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을 건너면서 부모와 잠시 헤어진 기억이 있는 어머니는 좀체 혼자 있으려 하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날은 햇볕에 지쳤는지, 혼자서 방에 있겠다 하신다. 여름 유럽 여행의 최고의 장점을 꼽으라면, 낮이 길다는 것이다. 한 차례 해변을 즐긴 이날도 햇볕은 여유가 있었다. 오후 4시, 동남아였으면 밤을 기다릴 시간에 자전거를 빌려 해변으로 떠났다.

떠나기 아쉬워 마을을 빙빙 돌다

‘자전거, 너는 자유다.’ ‘칼라로사’(Cala Rossa·붉은 만)로 향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포물선으로 움푹 들어온 만의 양쪽을 바위 절벽이 감싸고 있는 이곳은 2천여 년 전, 로마와 카르타고 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 로마군에 쫓겨 바위에 오르던 카르타고 병사들의 피가 붉게 물들어 생긴 이름이 칼라로사다. 혼자서 놀다가 길을 잃었다. 좁은 돌길에서 자전거를 끌기도 하면서 가는데, 해 지기 전에 숙소에 돌아갈 확신이 없었다. 어쨌든 여행자 마을 뒷산의 성곽을 깃발로 삼아 가는데 문득 농촌마을에 들어섰다. 이날 해 질 녘에 보았던 시칠리아 농촌의 풍경은 한없이 한적하고 더없이 아늑했다. 여명을 잃어가는 시간에 마음은 조급했지만, 마을을 떠나기 아쉬워 일부러 빙빙 돌았다.

노모를 모시고 떠난 동남아 여행에서 한 번도 만족을 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던 가이드로서 마지막 자존심이 남았다. 그분도 부에마리노의 물빛을 보아야 했다. 다음날 택시를 불렀다. 순박한 기사였다. 택시비가 얼마냐고 묻자 그가 뭐라고 답했다. 저렴한 가격에 잘못 들었나 싶어 “트웬티?”(Twenty)라고 물었다. 그가 “트웰브”(Twelve)라고 답했다. 그렇게 왕복 24유로(약 3만3500원)에 노모를 택시로 모시고 버스가 닿지 않는 곳에 갔다. 부에마리노의 물빛을 보고는 노모는 “몰디브 다음”이라고 그녀식의 격찬을 했다. 그러나 7월인데도 차가운 수온에 바다에 오래 머물진 못했다.

섬에는 영어 표지판이 없었다. 오직 이탈리아어. 여행자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밤마다 혼자 거닐었던 거리는 흥미로웠지만 불편했다. 자꾸만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기에 아시아인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나와 비슷한 얼굴의 사람이 없어서 느끼는 고립감은 상당했다. 스웨덴의 시골마을 같은 곳에서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한국계 입양인은 어땠을까, 조금은 상상이 되었다. 시칠리아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프런트 직원들도 데면데면, 친절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들른 시칠리아 본섬의 관광지, 타오르미나의 해변에는 중국인 마사지사가 있었다. 한 중국인 여인이 해변을 거닐며 마사지를 권했다. 여행자들의 거절이 이어졌지만 계속 씩씩하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1970년대 상경한 시골사람이 고향의 순이를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반가움도 이랬을까 생각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눈빛 ‘맞짱’을 열심히 떴지만, 그들은 눈을 마주친 한참 뒤에야 눈길을 돌렸다.

파비냐나의 부에마리노에서 어른들은 바위에 누워 선탠을 하고, 아이들은 바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다이빙을 즐겼다.

파비냐나의 부에마리노에서 어른들은 바위에 누워 선탠을 하고, 아이들은 바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다이빙을 즐겼다.

시칠리아의 마지막 이틀은 타오르미나에서 보냈다. 시칠리아를 관통해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달려온 이유를 마을 정상의 그리스 원형극장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버스로 20분을 오르고, 다시 20분을 걸어야 오르는 곳에 2천 년도 넘은 야외극장이 있었다. 여기서 한없이 푸른 지중해 해변을 따라 이어진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이것을 보았으니 이제 어떤 유적을 보고 감동할 것인가.’ 유재현 작가가 앙코르 유적을 보고 뱉었던 탄식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마을들은 한결같이 산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노모는 “누가누가 높이 오르나 경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마을에서 오히려 전쟁이 보였다. 높은 곳에 살면서 적이 오는지를 항상 살펴야 하고, 적보다 높은 곳에서 돌을 던져야 생존이 가능했던 고단한 서양의 역사가 보였다. 그렇게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도시가 세워졌고, 로마 식민지가 이어졌다. 남쪽에서 온 북아프리카인들이, 머나먼 북해에서 온 노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수백년씩 지배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다양한 문화층이 지중해와 어우러진 시칠리아다.

산 정상의 원형극장, 산에서 본 전쟁

물론 순박한 시칠리아 사람들을 기억한다. 파비냐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달구지를 탄 소년들이 나타났다. 영화에서처럼, 웃통을 벗은 소년은 “카오”(Chao)라고 인사하고 말의 이름이 “아미고”라고 말했다. 파비냐나 여행자 거리에서 투어 상품을 팔던 할머니는 손녀가 기특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할머니가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초등학생 손녀는 영어로 통역했다. 해파리가 남긴 시칠리아 문신을 몸에 새기고 그곳을 떠났다.

파비냐나(이탈리아)=글·사진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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