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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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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에서 노동자로 나의 역사를 쓰다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로 살아온 길을

직접 기록한 <열세 살 여공의 삶>의 신순애씨
등록 2014-05-31 15:45 수정 2020-05-03 04:27

그는 ‘이름 없는’ 7번 시다였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13살 때부터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작은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높이가 1m도 안 되는 좁은 다락방에서 하루 13∼14시간 기계처럼 움직였다. 전태일의 정신을 이어받은 청계피복지부(청계노조)를 알게 된 뒤 삶이 달라졌다. 비로소 ‘신순애’라는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40여 년의 시간이 흘러 60대가 된 그는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석사 논문으로 쓰고 그것을 책 (한겨레출판 펴냄)으로 엮었다. 지난 5월22일, 서울 신촌에 있는 ‘탁틴내일’에서 신순애씨를 만났다.

에 등장하는 어린 여공의 상징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에 등장하는 ‘어린 여공’인 그의 삶은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역사다. 1975년부터 1981년 청계노조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노조활동을 했다. 노조의 굵직굵직한 투쟁에 참여했고 임금 인상, 퇴직금 받기, 1일 8시간 노동시간 등을 이뤘다.

신순애씨는 “노동자들이 자기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세 살 여공의 삶〉을 썼다”고 했다.

신순애씨는 “노동자들이 자기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세 살 여공의 삶〉을 썼다”고 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관한 역사는 대부분 지식인에 의해 쓰였다. 운동사와 사건사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연구는 당시 여공들이 무엇을 경험했고, 어떻게 노동자로 성장해갔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53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고, 어느 날 교수님이 유럽에는 한 개인의 생애사적 논문이 많다며 저한테도 써보라고 권했어요.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등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과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으로 논문을 쓰기로 했죠.”

지난 일을 기록하기 위해 자료를 찾으며 잊었던 날도 되찾았다. “공권력의 청계노조 노동교실 탄압에 저항했던 9·9 사건으로 법정에 섰는데 큰 충격을 받아 쓰러져 그때를 기억할 수 없었어요.” 사라진 기억의 퍼즐을 1970년대 여공들의 투쟁을 기록한 이태호씨의 책 에서 찾았다. ‘빨갱이 색깔론’에 항변하다가 기절했던 그날이 기록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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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간 여성 노조 활동가들’이라는 마지막 장을 쓸 때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단다. 1975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형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노조 조합원의 상처를 담고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을 못하게 됐던 힘겨운 시간에 대해 쓰는 게 고통스러워서다. “70년대 ‘데모할 땐 허리띠 매고 다녀라’ ‘절대 치마를 입지 말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어요. 성고문을 당할 수 있어서였죠. 저 역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을 때 맞는 것보다 성고문을 당할까봐 두려웠어요.”

굳은살과 굽은 등, 몸에 남은 시간

1997년부터 ‘탁틴내일’에서 청소년 성 상담을 하고 있지만 봉제노동자로 살아온 시간의 흔적은 몸에 남아 있다. 가위질을 하던 오른쪽 손가락엔 굳은살, 무릎을 꿇고 허리도 못 펴고 일해 굽은 등, 과로와 영양실조로 생긴 결핵까지.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시간이다. “70년대 유신시대로부터 40여 년이 지났지만 사회나 노동 환경이나 나아지지 않았어요.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노력하면 잘살 거라는 의욕도 꺾어버리고. 노동탄압도 여전하고 손배소송으로 더 꼼짝 못하게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가 쓴 암울한 노동운동의 시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고.

글·사진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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