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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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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다, 쪽팔려서

‘떡’ 데렐라 되는 그분이 번역한 <축구의 사회학>
등록 2014-05-29 14:4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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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한창이던 1월의 어느 날,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러 가는데 거실에 시커멓고 커다란 것이 앉아 있다. “헉, 거기서 뭐해요?” “책 봐.” 그날 이후로도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이상한 느낌에 깨면 새벽 서너 시. 어김없이 거실 불은 켜져 있고 기괴한 분위기의 책읽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출판사에서 가져온 A3 교정지까지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밤 12시 이후에 존재하는 그분의 모습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사람이 아닌 알코올에 전 떡이 되어 있거나, 케이블에서 하는 온갖 축구 경기에 홀딱 빠져 있거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지, 참다못해 서울 압구정의 용한 도사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술도 안 마시고, 축구도 안 보고, 잠도 안 잔다. 그렇다고 왜 독서를?

2008년 10월 YTN 기자 6명이 해고되었다. MB 정부의 첫 번째 낙하산 사장에 반대했다는 이유였다. 다음해 2009년 1월,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벌였던 KBS 사원행동 직원들에게 보복성 징계가 내려졌다. 그 직원 중 한 명이 당시에 저러고 계셨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직 많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잊지 않겠다고, 행동하겠다고. 그 말의 뒤에는 우리가 망각하는 순간, 이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망각이라는 건 뭘까. 그건 기억의 문제이거나,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MB 정부 시절 YTN과 KBS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인들이 싸웠는데도 언론의 공정성이 지속적으로 훼손된 것은 내부 구성원들이 앞의 투쟁을 잊어서도, 행동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상식과 공정성은 담보되던 시절에, 한국 사회가 권력으로부터 언론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현실적인 실력의 문제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뉴스가 한순간에 망가지는 게 구성원들이 사명감과 도덕심을 잊어버려서일 리가 없다.

그러니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거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미 우리는 오늘 겪은 일의 징조를 수년째 꾸준히 봐왔고, 둑을 쌓을 수 있었던 시기에 더 높은 둑을 쌓지 못한 것임을 그저 확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이토록 큰 비극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게 비극인 것이다.

그때 한동안 계속되는 기이한 행태를 보다 못해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쪽팔려서.’ 지금 KBS 기자들이 똑같은 말을 한다. ‘창피하다’고. 님들만 창피한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다 창피합니다. 그런데 창피하면 책을 읽게 되나요? 출판사 다니는 저도 몰랐던 독서의 동기네요. 덧붙여 지금도 12시 이후면 사람이 아닌 떡이 되는 그분이 번역한 책으로 이 있다. 월드컵 경기에 빠진다고 세상을 잊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나보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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