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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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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다면 꺼내 들고 다녀라

출판편집자들이 밥과 술 사주고 싶은 사람
등록 2013-08-29 14:11 수정 2020-05-03 04:27

기차에서 제일 안 좋은 자리는? 문 바로 앞, 통로 쪽 자리다. 거기 앉으면 열차 안을 오가는 모든 승객에게 내가 이 차량의 첫인상이 되고, 더하여 접촉 사고도 숱하게 일어난다. 게다가 입 벌리고 잠이라도 드는 날에는…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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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 무렵이라 그 자리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국제통화기금(IMF) 때문에 백수 면하러 대학원에 간 지 1년, 고향 가는 기차였다. 당시 새마을호가 빠르다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30분.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읽을거리를 챙겨 탔다(물론 먹을거리가 더 많았다). 옆자리에는 중년의 남자가 갓 나온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나도 자리에 앉아 얇은 문고본 책 하나를 꺼내 읽는데, 그분이 말을 걸었다.

‘뭐야, 나이가 몇이냐. 집이 어디냐는 호구조사 하려고?’ 그런데 의외였다. “그 자리 많이 불편하죠. 대전까지 가는데 잠깐이라도 바꿔줄까요?” 헉, 한국에도 젠틀맨이 살고 있었네. 나는 레이디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호의를 세련되게 받을 줄 몰랐다. 잠시 뒤 또 말을 건다. “석간신문 못 보셨죠? 전 다 보았는데, 내려가며 보세요.” 그러고는 뭔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조용하다. 가만보니 이분 참 점잖네. 다리도 안 벌리고, 몸도 뒤로 안 젖히고.

출발한 지 30분쯤 지나 열차 안이 부스럭댔다. 먹는 타임이 된 것이다. 곳곳에서 승객들이 도시락이며 과자며 꺼냈으나, 나에게 그런 게 있나. 마실 물도 안 챙겼는데. 그때 그분이 말한다. “저녁 안 먹었죠? 식당칸에서 도시락이라도 드실지.” 그 비싼 새마을호 식당칸 도시락이라니! 이건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바짝 얼어 식당칸에 앉으니 그분이 웃으며 설명한다. “이상하게 생각 마세요. 아까 읽던 책을 제가 매우 좋아합니다. 어렵지는 않나요? 어린 학생 같은데.” 아니, 나를 뭘로 보고. “여러 번 읽어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친해졌을 것 같은가? 전혀. 그분은 그 고급 도시락만큼 깔끔하게 밥만 사주고 곧 내렸다. 단, 내리기 전에 명함을 하나 주었다. ‘솔 출판사 임우기’. 문단에서 술·의리·배포로 알아주는, 문학평론가 임우기 대표였다. 그리고 내가 읽던 책은 솔에서 나온 루이 알튀세르의 이었다.

출판편집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자메시지가 뭔지 아는가. “지하철에서 네가 만든 책 보고 있는 사람 발견!” 이런 문자가 이성의 데이트 신청보다 더 반갑다. 최근에는 ‘책 읽는 지하철’이라는 독서모임도 등장했다. 여럿이 우르르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는 ‘플래시몹’이란다. 생각해보면 책을 책상에서 읽었던 것보다 오며 가며 길에서 읽은 기억이 더 많다. 그런데 그 풍경이 얼마나 귀해졌으면 ‘놀이’까지 되었나. 그러니 지금 만약 내 옆자리 사람이, 그것도 내가 만든 책을 보고 있다면? 밥뿐이랴 술도 사준다. 만약 가방 안에 책이 있다면, 꺼내어 들고 다니시라. 혹시 아는가. 그런 인연이 생길지. 그런데 그 뒤로 출판계에 들어와 임우기 대표님을 만난 적은 없냐고? 물론 만났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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