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선배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좋아?” “하나 물어볼게. 너는 몸에 털이 많은 남자가 섹시해?” “욕을 막 하면 남자다워 보여?” 드디어 네가 정신줄이 나갔구나, 일 안 하고 뭐하는 거냐. 그때 내 주변의 여자 동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원고 보다 말고 왜 저런 걸 묻고 다니는 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게 뭐하는 짓인지.
로맨스소설을 출판하는 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각 나라마다 좋아하는 로맨스의 취향이 다르고, 특히 한국의 여성 독자들이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는 너무나 분명해서, 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로맨스소설이라 해도 번역해서 냈을 때 독자에게 외면받는 경우가 꽤 있단다. 그 친구가 이야기해준 멋진 남자의 기준을 말했다가는 여기저기서 돌 날아올 것 같으니 생략하겠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내 손에 처음으로 떨어진 한 역사스릴러가 그런 고민을 던져줄 줄 몰랐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중세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연쇄아동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여자 검시의였다. 한창 미국드라마 <csi> 등이 인기가 있던 때이기도 해서, 이 책에 거는 출판사의 기대는 컸다. 다행히 소설은 매우 재미있었다.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천재적인 두뇌와 싸늘한 심장을 가진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뒤흔들 인물이니 오죽 멋있어야 할까. 그런데 원고에 묘사된 이 남자는 한마디로 완전 날건달이었다. 캐릭터야 그럴 수도 있겠으나, 여성 독자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남자의 외모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저런 산적 같은 남자와 어떻게 달달한 로맨스를 한단 말인가.
참다 못한 나는 그 남자에게 칼을 대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을 ‘키가 큰’으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해 그의 피부, 다리 길이, 머릿결 등에 대한 수식어를 비슷한 듯 보이나 다른 의미의 말로 바꾸었다. 그뿐인가. 온갖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장면의 경우, 사실 겉으로만 바람둥이일 뿐 속으로는 그녀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식으로 바꾸었다. 그 바뀐 원고를 두고 교정·교열 보는 선배와 번역하신 선생님도 크게 만족하셨다. 여자 셋이 좋다는데 됐지, 뭐. 나는 두고두고 뿌듯해했다.
그런데 몇 년 뒤 그 책을 우연히 다시 읽다 깜짝 놀랐다. 남자 주인공이 멋있기는커녕 어찌나 상투적으로 느껴지는지. ‘누구나 다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굳이 왜 이런 남자가 운명의 상대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 취향도 시간이 가면 변한다. 특히 평생 안 변할 것 같은 ‘이상형’에 대한 취향도 어느 순간 완전히 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타인의 취향에 대해 쉽게 호불호를 나타내서야 되겠는가. 지난해 어느 소설의 제목 안을 담당 편집자가 들고 올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돌려보냈다. 그러다 여봐란듯이 가져온 한 제목 안을 보는 순간 바로 오케이했다. 그 제목은 바로 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다시는 고집 안 부리마.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c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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