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로 나온 책에 대해 물어보다 끊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왼쪽이요 오른쪽이요?” “음, 글쎄요.”
어느 쪽인지 의심받았던 그 책의 원서 제목은 ‘그리드락 이코노미’(Gridlock Economy), 한국어판 제목은 이었다. 여기서 ‘그리드락’은 교차로에서 발생한 교통정체를 말한다. 사거리의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들이 서로 가겠다고 뒤엉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말이다. 그런데 이게 경제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내가 먼저 가겠다고 우기면 나를 비롯해 아무도 움직일 수 없듯이, 각자의 소유권만 주장하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경제적 손실이 생기는 상황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데, 해결해야 하는 특허가 너무 많고 치러야 하는 비용도 너무 커서 결국 개발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유와 개방의 정신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책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낡은 아파트를 재개발해야 하는데,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소유자 100명의 이해관계가 다 달라서 결국 개발하지 못해 슬럼이 돼버린다는 식의 설명도 이 책에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때가 2009년이니 새 정부의 뉴타운 개발 정책이 엄청난 기대를 받던 상황이었다. 잘못하면 괜히 이쪽 책이니 저쪽 책이니 의심의 눈초리만 받다가 아무도 손에 안 집는 책이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락앤락인지 그리드락인지, 그 용어도 어려워 죽겠는데 걱정이 태산 같았다.
편집자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냐고 하겠지만, 한국이라서 그렇다. 한국의 편집자들은 이런 고민을 종종 하게 된다. 특히 대중적이지 않은 책이어서 언론 서평란에 소개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할수록 더욱 그렇다. ‘좀 왼쪽 성향의 책이 아닌가’ ‘진보적이지도 않은 책인데 왜 굳이 우리가?’ 이렇게 생각돼 모든 언론사에서 버림받으면? 안 돼! 그래서 나는 보도자료를 쓸 때가 되자, 세 단어를 책상 앞에 떡하니 붙였다.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그리고 애매모호하게. 책을 언론사에 보내고 나자 숱하게 전화가 왔다. 이 책 내용 좀 설명해봐라. 결국 입장이 뭐냐? 아니, 왜 책에다 입장을 묻냐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은 일간지는 물론 각종 주간지까지 기사를 싹쓸이했다. 내 편집자 인생에서 그렇게 서평을 많이 받아본 책은 없었다. 몇 달 뒤 모 경제연구소 추천도서까지 되자, 그 얼떨떨한 기분이라니.
편집자로 일하면서 느낀다.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 건 문제도 아니다. 왜곡해서 읽는 것도 봐줄 수 있다. 아예 읽지 않는 게 제일 문제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이제는 사실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단어가 ‘팩트’라는 말이 되지 않았나. 우리 사회의 독서량이 그토록 적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안 봐도 뻔하지, 뭐’라는 말이 공공연한데 어디 책이 팔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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