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자꾸 그들을 흘끔거렸다. 맞은편에 파란 눈에 콧수염을 기른 키 큰 외국인 남자와 흰 겨울 망토를 입은 만삭의 여인네가 앉아 있었다. ‘저들은 무슨 사연으로 여기에 왔을까.’ 그러나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홍삼 캔디를 까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뒤 스피커에서 번호를 불렀다. 순서가 된 것이다.
박노자 선생님과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오태양씨를 찾은 날이었다. 2004년 겨울이었다. 내가 일하던 계간지에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오태양씨와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박노자 선생님의 서신 교환을 싣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박노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많은 이야기 중에 불교식 태교법, 홍삼 캔디 예찬론 등도 기억나지만,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은 면회실 풍경이다. 예전에 다른 이를 면회 갔던 일을 떠올리며 ‘시설이 좀 좋아졌겠지’ 했던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여전히 낡고 좁은 방, 변한 것 없는 수감자의 의복, 그리고 겨우 7분의 시간.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으니 오히려 할 말을 고르느라 몇 마디 나누지 못하게 되는 듯했다. 전국의 구치소를 다 가본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세월이 꽤 지났으니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0년쯤 지나면 이런 편지를 실을 일은 없겠지?’라던 한 편집자의 기대는 참으로 순진했던 것이 분명하다.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곧 입대를 하게 되는 저자가 있다. 몇 달 전 한 일간지에서 문화비평을 써줄 젊은 저자를 추천해달라고 하기에, 이분이 떠올랐으나 어쩌겠는가. 군대를 가야 하는데…. 추천을 포기하고 돌아서니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군대에 가면 외부 매체에 글을 쓸 수 없나?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써도 되나? 국방부 홍보실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알려주나? 그런데 군인에게 글을 청탁하는 매체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나도 아들 가진 엄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다. ‘얘들이 컸을 때면 대체복무제나 모병제가 도입돼 있겠지.’ ‘군대가 훨씬 더 좋아져 있겠지.’ 그러나 지난 국군의 날에 벌어졌던 엄청난 퍼레이드를 보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며, 머릿속에서 당연한 것이 현실이 되는 데는 수많은 글과 말과 행동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언젠가 한 온라인 서점한테서 국내 인문서 중 10년 뒤에도 다시 꺼내 읽을 만큼 인상적이던 책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주저 없이 2001년에 나온 박노자 선생님의 을 꼽았다. 우리 안의 권위주의, 군사주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타성을 들춰내는 이 책에 한국 사회는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뒤를 잇는 책을 아직 못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빚진 기분이다. 그런 기분이 들면, 그 겨울 구치소 면회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때 같이 면회를 갔던 뱃속의 우리 아들은 열혈 밀리터리 마니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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