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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이야기다

‘영화감독 세헤라자데’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록 2014-04-14 14:02 수정 2020-05-03 04:27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아라비아의 한 포악한 왕이 아내의 정조를 의심해 처형하고,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성 안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차례로 들여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죽여버리는 끔찍한 행각을 벌인다. 이에 영리한 한 아가씨가 나서서 첫날밤을 치르고는 미리 몰래 침실에 함께 들여온 여동생에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엿듣던 왕은 이제 동이 터오니 빨리 사형을 집행해야겠는데 이 재미난 이야기가 아직도 끝나지를 않는다! 미진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던 왕은 하루 더 말미를 준다. 그러자 아가씨는 또 동틀 무렵 클라이맥스를 맞게끔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고, 왕은 애달아서 하루를 더 주고, 이런 반복이 무려 1천 일 동안 이어졌으며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왕은 자신의 원한도 복수도 다 잊었다고 한다. 이 1천 일간의 이야기가 바로 고, 그 여인의 이름은 세헤라자데다.

세헤라자데는 모든 이야기꾼, 모든 창작쟁이의 꿈이다.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내러티브. 신나는 어드벤처를 집어넣기도 하고 기이한 인물을 지어내기도 하고 카타르시스의 소원 수리를 해주기도 하며 풀리지 않을 듯한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가기도 한다.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면서부터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의 문제로 옮겨왔다. 누구나 다 아는 역사가, 느닷없이 태어난 ‘토끼영장류’의 시각으로 재구성되기도 하고(, 김남일), 기이한 할아버지의 기행담(, 요나스 요나손)으로 짜이기도 한다. 그들이 결국 말하는 인생이란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도 되지 않았고,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이지만, 되짚어보는 역사적 사건들은 새삼스럽게 기이하고 웃기면서 새롭다.

영화 은 세계대전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 사건을 미지의 호텔 공간에 옮겨놓는다. 그 현란한 이야기 솜씨에 역사적 비극은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의 한낱 배경이 되고, 한 개인에게 가장 잔혹했을 순간도 그저 스치듯 묘사된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것이, 경중도 전후도 없이 봅슬레이 궤도에서의 한바탕 눈먼 질주처럼, 멘들스 과자의 핑크 상자와 소년이 든 사과와 창밖에 던져진 고양이와 잘려나간 손가락 몇 개를 같은 무게로 실은 채 달려나간다. 우리의 숨가쁜 하루하루 삶도 결국은 이 소용돌이의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게 만드는, 현란하고 요사스러운 이야기꾼의 신비한 세계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다!’라고 선언하는, 영화감독 세헤라자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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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하 회사원·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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