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가정은 참 매혹적이다. 그때 준비하던 시험을 마저 봤더라면, 첫 직장을 그만두지 말고 그냥 다녔더라면, 버릴 건 빨리 버렸더라면. 그러나 그래봤자 나란 사람은 결국 또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됐으리라는 사실 또한 맘에 든다. 의 팀은 무려 세 번에 걸쳐 첫날밤을 반복하지만, 그가 브라 끈을 얼마나 능숙하게 끌렀는지가, 메리와의 결혼생활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커플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한때 나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의사가 되었다면, 하고 바란 적이 있다. 이렇게 평생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며 근근이 연명하지 말고, 사회가 대접해주는 전문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면 어땠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가 아니라 그 무엇이 됐대도, 나는 글 쓰는 일로 돌아왔을 것 같다. 사람은 결국 자기 생긴 대로 살게 돼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 열광하면서 보았던 보다 이 더 맘에 다가온다. 시간을 아무리 돌이켜도 킷캣이 개차반 지미를 만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용기를 냄으로써 킷캣은, 말하자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여행의 매혹은 사라지고, 결국 과거의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는 허망함만 남는다. 그리고 한편, 그것은 또 다행이기도 하다. 지금 내 삶은 나로서 최선이었다는 위로가 되므로.
하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만약 잠깐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다. 지난해 겨울, 한 지인의 부음을 들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나 신뢰하고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병을 얻어 혼자 낙향해 힘들게 투병하다가 아직 어린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잠만 따로 잤달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충격과 슬픔 속에 지인과 좋았던 기억, 미안했던 기억들을 더듬던 중 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 떠나기 바로 얼마 전 갑자기 전화가 왔다고 한다. 나 지금 아이 만나러 서울 가는 길인데 네가 시간 되면 혹시 같이 만나 아이에게 만두를 좀 사줄 수 있겠느냐고. 친구는 그러나 멀리 있었고 미안한 맘으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그 지인의 마지막이 됐다.
만약 과거로 딱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지난해 크리스마스 즈음 서울 명동의 만둣집 근처로 가고 싶다. 서성이고 있다가 우연을 가장해 지인과 아이 앞에 나타나, 너스레를 떨며 소매를 잡아끌고 만둣집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다. 그런다 해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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