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신작 는 여러모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유학 추천서 한 장 받으러 모처럼 학교를 찾은 선희는 어리바리 세 남자를 한 큐에 후린다. 뼛속까지 하녀인지라, 돌쇠 남친한테도 마님 대접 못 받는 A양과 김치말이국수와 떡갈비를 흡입하며 ‘워너비 선희’를 외쳤다. “그래도 선희 같은 애들이 원래 친구가 없잖아.”그랬다. 영화 속 선희에겐 (여자)친구가 없었다.
선희는 별로 안 부러워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A양 같은 친구가 넷(이나?) 있다. ‘여자들끼리 몰려다니니 연애 못하지’란 책임지지 못할 멘트는 넣어둬라. 얘들마저 없으면 더 외롭다. 겉보기엔 멀쩡하나, 실속이라곤 없는 친구들이다. 아, 에이스 K양은 여기서 제외해야 온당하다. 20대 중반 어느 날, 엉겁결에 쭈구리 친구들을 만나 K양의 싱글라이프는 하향 평준화됐다(며 우리는 늘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도 에이스는 에이스인지라, 맛있으나 몸엔 해로운 MSG를 물리치고, 몸에 좋고 실한 천일염과 결혼했다.
눈치는 없지만, 유독 이런 언니들을 한눈에 알아보는 귀신 같은 ‘촉’이 있다. 뼛속하녀 A양과 알고 보니 호구 H양은 대학 입학 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사이다. 유독 귀가 위쪽에 달려(우리 학교 두발 단속 기준이 귀밑 5cm였다), 고딩 단발머리를 휘날리고 다니던 그해 봄.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H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성격 파탄인지 몰랐단다. A양은 그때만 해도 H여고 학생회장 포스를 뿜어냈다. 안 친해질 줄 알았던 이 3명은, 역시나 남자 보는 취향이 다 다른 덕분에 삼인삼색 짝사랑의 고통을 나누며 4년 내내 (노래방에만) 붙어다녔다.
8년 전 이맘때였을 것이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서울 종로 B레스토랑에 A·H·K양 그리고 긍정의 화신 J양이 합류했다. 오랜만에 얼굴 봤으니 반갑다며 모임 하나 만들어보잔 빈말은 곧 현실이 됐다. 다들 적잖이 외로웠던 게지. 모임 이름은 바로 정해졌다. SB. ‘싱글 & 박봉’(혹은 박복)의 약자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제 SB 진성 당원은 나만 남았다. 그러나 끈끈이에 모여든 파리떼처럼, 심하면 주당 3회 ‘벙개’를 달리는 SB의 결속력은 여전하다. 결속력 유지 비법을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우선 누구 하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연애 및 남자 상담시 ‘오답’ 돌려막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는 비밀 카페의 존재다. 직딩들의 결속력을 좌우하는 건, 뭐니뭐니 해도 뒷담화다. 각자 일터가 다른 경우, 뒷담화 동맹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카페 게시판·단체 카카오톡 방·메신저 3중 소통 시스템은 어떤 미친×가 K를 물고 넘어졌는지를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더구나 이 카페를 탈퇴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으니, 우리를 스쳐지나간 ‘한 줌’ 남자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눈·코·입 외 유독 얼굴에 여백이 많아), 잠수부(꾀어놓고 잠수 탄), 궁뎅씨(힙업이 남달랐다) 등등. SB들에게 웃음을 선물해준 그대들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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