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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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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하고도 위대한 삶들

인도와 미국 하층계급 다룬 두 권의 르포르타주, 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과 레그 테리오의 <노동계급은 없다>
등록 2013-09-13 17:24 수정 2020-05-03 04:27

“몇 주 전에 압둘은 이곳에서 한 소년이 플라스틱을 분쇄기에 넣다가 손이 잘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손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밥벌이 능력도 그렇게 잘려나갔건만, 소년은 공장 주인에게 빌기 시작했다. ‘사아브, 죄송합니다. 이걸 신고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때문에 곤란을 겪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뭄바이의 빈민촌 수년간 밀착 취재

‘세계의 비참’을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힘이 든다. 미국 주간지 기자인 캐서린 부의 (강수정 옮김, 반비 펴냄)은 인도 뭄바이의 빈민촌을 수년간 밀착 취재하며 인도 경제 성장의 이면을 아프게 고발한 책이다. 저자는 안나와디의 빈민촌에서 가난과 불행의 인간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세계화가 양산한 구조적 빈곤과 불평등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지 드러낸다.

인도 뭄바이 빈민촌 안나와 디의 아이들. 19세기에 찰 스 디킨스가 묘사했고 20 세기에 조지 오웰이 묘사했 듯, 21세기에 캐서린 부는 뭄바이라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도시에 내재 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가장 통 렬하게 고발하고 있다.반비 제공

인도 뭄바이 빈민촌 안나와 디의 아이들. 19세기에 찰 스 디킨스가 묘사했고 20 세기에 조지 오웰이 묘사했 듯, 21세기에 캐서린 부는 뭄바이라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도시에 내재 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가장 통 렬하게 고발하고 있다.반비 제공

저자는 ‘외다리의 분신자살’이라는 참혹한 사건을 중심으로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외다리 파티마가 옆집과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분신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의 가해자로 옆집 소년 압둘과 그 아버지, 누나가 지목돼 감옥에 갇히고, 가족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어머니 제루니사의 힘겨운 투쟁이 시작된다. 부패한 경찰과 의사들은 이 비통한 사건에서 뒷돈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누명을 벗겨줄 재판은 기약 없이 미루어지기만 한다. 이 사건으로, 부지런히 돈을 모아 빈민촌을 벗어나려던 압둘 가족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 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안나와디 빈민촌에는 비통한 삶으로 기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부모와 오빠에게 매일 매를 맞으며 살던 15살 소녀 미나는 결국 쥐약을 삼키는 것으로 못다 핀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목숨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돈벌이를 하던 칼루는 결국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저자는 탁월한 문학적 구성과 문장으로 이 모든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촘촘히 엮어낸다. 명확한 사실관계를 모아 ‘슬럼가의 쓰레기 호수가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한 편의 잘 쓰인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저자의 글쓰기는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다.

취재 대상의 삶 속으로 뛰어들되,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면밀히 확인한 뒤 글을 쓴다는 원칙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과를 종합해 도시의 빈곤과 불평등을 야기한 구조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르포르타주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 ‘워킹클래스 히어로’의 삶

반면 레그 테리오의 (박광호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는 객관의 자리가 아닌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한 늙은 노동자의 노동 르포르타주다.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대학까지 그만두고 평생을 부두노동자로 산 저자의 이력처럼, 이 책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부심으로 돌올하다. 단합 장소가 되던 항구의 선술집, 열띤 토론으로 뜨겁던 노조 회의장, 하역하던 갖가지 화물과 떠돌이 과실 품꾼으로 살아온 부모님의 뒷모습 등 이제는 사라져버린 노동계급의 문화가 그를 통해 전해진다. 강성노조인 미국부두항만노조(ILWU)에서 직접 활동한 저자는 이 책에 친자본적인 정당과 정부의 모습, 고용주와의 싸움 끝에 얻은 성과와 참혹한 패배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완숙한 경험으로 투쟁을 견뎌온 한 ‘워킹클래스 히어로’의 삶 앞에서 ‘얼치기 먹물’은 옷깃을 여밀 수밖에.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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