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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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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에게 권한다

등록 2012-12-28 14:28 수정 2020-05-03 04:27

변화는 유예됐고, 개혁은 좌절됐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바뀔 것처럼 지저귀던 말들은 우리만의 속삭임이었으며, 결과를 장담하던 언어는 우리만의 안이한 낙관이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칭 보수들에게 5년을 더 맡기게 되었다. 더 갈 수 있는 오른쪽이 남아 있을까. 한국 사회 앞엔 퇴행과 보수화의 길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절망할 시간은 없다. 국가가 돌보지 않는 춥고 서러운 사람들이 오늘도 내일도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변화는 아래에서부터 비롯되는 법. 자, 여기 고장 난 한국 사회의 적나라한 견적을 보자.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지난 1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는 한 주민이 2평짜리 쪽방에서 TV를 보고 있다. 참여연대의 는 빈곤부터 평화까지 한국 사회의 55가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지난 1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는 한 주민이 2평짜리 쪽방에서 TV를 보고 있다. 참여연대의 는 빈곤부터 평화까지 한국 사회의 55가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민생·경제부터 행정·사법 개혁까지

노인 빈곤율 4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인 나라, 전체 가구의 62.8%가 부채를 안고 있는 나라, 평균 1.09%의 지분을 가진 재벌 총수들이 평균 59.2개의 회사를 지배하는 나라, 비례대표 의석이 겨우 18%인 나라, 군사비가 271억1300만달러로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데도 군비경쟁에 열을 올리는 나라, 해군기지를 만든다며 천연기념물 군락지를 파괴하는 나라. 고장이 나 삐걱거리는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이 ‘고장 난 나라’를 수선하는 데 필요한 정비 목록이 나왔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완성한 정비 목록, (이매진 펴냄)는 한국 사회에서 개혁돼야 할 55가지 이슈를 망라하고 있다. 꼼꼼하게 체크한 팩트 아래 내린 냉철한 진단을 바탕으로 흔히 갖기 쉬운 의문을 더해 쟁점을 정리했다. 이 두꺼운 수선 목록은 한국 사회를 직접 진단하고 바꿔나가려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로드맵’이라 부를 만하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자’에서 저자들은 민생과 경제, 노동에 관해 들여다본다. 400만 명이 넘는 빈곤층을 시각지대에 방치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기준의 문제점, 부모가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공교육 확충 문제, 아픈 만큼 치료받는 사회를 만드는 건강보험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 전체 가구의 절반이 넘는 세입자에게 안정된 주거를 제공할 공공 임대주택 확대 공급 등이 1부에서 살펴보는 쟁점들이다. 최근 이슈가 된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재벌 순환출자와 금산분리, 중소기업과 중소상인 살리는 계열분리명령제, 한국판 버핏세와 6시간 근무제도 빼놓을 수 없다.

2부 ‘중구난방 공화국’에서는 행정·입법·사법부 바로 세우기,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에 관해 살펴본다. 공익 제보자를 보호하는 방법, 200만 권에 그치는 국가 기록물 문제, 국가정보원 개혁, 비례대표제도가 대표하는 내 한 표의 가치, 국회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정부의 문제점 등을 속속들이 짚어낸다. 또한 선거철만 되면 난립하는 표현의 자유 규제, 투표 시간 연장, 대검 중수부 폐지와 지방검찰청장 직선제로 대표되는 검찰 개혁,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차단된 트위터 계정이 보여준 인터넷 검열 문제, 리트윗 하나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은 박정근씨 사례가 보여주는 국가보안법 문제 등도 낱낱이 파 헤치고 있다.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

마지막으로 3부 ‘백범이 꿈꾼 나라, 안중근이 그린 세 계’에서 우리는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을 마 주한다. 북방한계선, 천안함을 둘러싼 진실과 거짓, 제 주 해군기지의 득과 실, 군비경쟁과 안보 딜레마, 군복 무 기간 단축의 현실성,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세계적 추세와 실현 가능한 대체복무제 등이 싸움의 구체적인 지점들이다. 또한 한-미 동맹은 과연 평등한 국가 안보 의 초석인지, 동북아 평화 체제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지, 탈핵 시대를 향해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 한국의 해외 파병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자유무역협정 (FTA)의 진실은 무엇인지. 평화로 가는 길은 멀게만 보 인다.

2013년, 박근혜 당선인은 MB 정부에 이어 새로운 정 부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정책 기조에서 박근혜 정부 가 MB 정부와 차별성을 지니리라 예상할 근거는 별로 없다. 약자보다는 강자에게, 서민보다는 부자에게 관대 한 정부가 될 터이다. 정책의 타당성과 그 방향의 옳고 그름, 또 현실성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깨어 있는 시민의 소 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55가지 키워드는 우리 에게 좋은 가이드가 돼준다. 기초노령연금, 건강보험, 국 가보안법과 대검 중수부부터 FTA까지 이 책이 망라하 는 이슈들은 우리 사회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이다. 참여연대 18년 노하우가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책이, 여전 히 논쟁 중인 이 문제들을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해결해 나가는 데, 그래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거 름이 되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자신을 지지하 지 않은 절반 가까운 유권자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그 리하여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위해 박근혜 당선인이 반 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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