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얼마예요?”
“어, 어… 아직 가격을 정하지 못했는데….”
“그럼 1천원에 가져갈까요?”
“아… 그거 그렇게 싸게 드리면 안 되는데….”
장이 섰다. 말줄임표를 남발하는 초보 판매자보다 손님이 더 노련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서초토요벼룩시장이다. 1998년 시작해 올해로 15년째 이어지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방배2동 지하철 사당역에서 이수역까지 약 1km에 달하는 복개도로를 따라 1천여 개의 좌판이 펼쳐졌다. 12월15일 판매자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결혼을 하며 새로 살 집에 짐을 옮겨오는데 남편은 내 신발 상자를 보고 “지네발이냐”고 물었다. 지네발의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아 신발장은 이내 터질 지경이 됐다. 신발만이 아니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집 안 구석구석 고여 있었다. 좀 덜어낼 필요가 있었다. 잘 안 신는 신발을 추려내니 15켤레가 나왔다. 옷장에도 빛을 보지 못한 물건이 한가득이다. 1년 이상 쓰이지 않은 물건을 소환 대상으로 삼았다. 언젠가 유행이 돌아오겠거니 넣어둔 옷, 다이어트하고 다시 입겠다 했으나 여러 계절 그냥 지나오기만 한 옷 따위를 꺼냈다. 그리고 예전에 산 줄 모르고 또 사버린 책, 여행지에서 사온 팔찌, 언젠가는 쓰겠지 하고 쟁여둔 살림들…. 늘어놓은 물건들은 모두 갖고 싶다는, 혹은 소비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대부분 당장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는 물건이다. 추려서 신발 10켤레, 겨울옷 7벌을 넣으니 금세 여행용 가방이 꽉 찼다.
벼룩시장은 지나친 소비를 줄이고 환경에 끼치는 부담도 덜자는 뜻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나둘 열리기 시작한 게 1990년, 2000년대 말부터 경제위기 여파로 그 수가 크게 늘었다. 직접 만든 물건만 판매 가능한 벼룩시장, 클럽에서 한밤중에 열리는 벼룩시장 등 종류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이 중 매주 신청할 수 있고 규모가 크고 구색이 다양하다고 알려진 서초토요벼룩시장을 골랐다. 서초토요벼룩시장은 지역 주민, 타 지역민, 외국인을 따로 접수받아 추첨으로 자리를 배정하는데, 다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자리는 경쟁률이 높다. 12월10일 오후 3시께 신청을 했는데 200명 모집 인원에 신청자가 600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목요일, 당첨이 통지됐다. 460번을 배정받았다. 근처에 사는 대학 동기가 함께 판매자로 나섰다.
토요일 아침 9시 조금 넘어 시장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딱 보기에 우리 일행이 어리바리한지 이미 장사를 시작한 판매자 한 분이 우리 자리를 찾아줬다. “처음인가 보네. 젊은 사람들이 생활력 있네. 많이 팔아요”라고 인사를 전하고 갔다. 옆자리 판매자는 물건을 깔 수 있는 낡은 가방을 건네줬다. 어차피 집 안의 낡은 물건을 갖고 나와 파는 터라서 그런지 경계심도 경쟁도 없는 평화로운 장터였다. 장사를 마치고 일찍 자리를 뜨는 판매자들은 그날 처음 말을 튼 이웃에게 남은 자기 물건을 넘겨주고 잘 팔아보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 줄에 나란히 선 어느 판매자는 구제품 소매상 같았다. 낡은 목도리며 스웨터를 한 자루 풀더니 구석진 위치에 손님이 많이 찾지 않을까 걱정됐는지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구라, 마구라가 1천원!” 아마도 마후라(머플러)겠지. 주변 상인들의 웃음이 터졌다.
30만원 주고 산 안경테 1천원에 팔아물건을 다 펼쳐놓기도 전에 손님이 몰려와 이건 얼마냐 저건 얼마냐 물었다. 물건값을 정하지 못하고 나왔는데 손님들이 부르는 값을 보니 대충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이 보였다. 물건을 샀던 가격의 1%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너무 싸게 팔아버리면 아까울 것 같은 물건에는 5% 정도의 가격을 붙였다. 개중에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상냥하거나 고른 물건을 제 가치에 맞게 잘 써줄 것 같으면 가격을 훌쩍 낮춰 불렀다. 그러니까 가격이 정해지는 데 어떤 공정한 기준보다는 주인 마음이 통하는 시장이었다. 친구는 30만원 주고 산 오래된 안경테를 한 아주머니에게 1천원에 팔았다. 이제 자기 얼굴에 어울리지 않지만 정이 든 물건이라 내놓을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는데, 손님에게는 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안경을 책 읽을 때나 잠깐 쓰는데 3천원 주고 사기 아깝다며 망설이자 인심 좋게 1천원에 넘긴다. 집 안에서 잠자던 물건에 새 숨을 불어넣는 순간이다.
손님을 한 차례 치르고 시장을 돌아봤다. 시장 가운데 긴 줄이 서 있었다. 추첨에서 떨어진 대기자들이, 당첨됐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의 빈자리를 배정받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는 이민혁(27·서울 송파구)씨는 “사람들 얘기가 오늘 200번까지는 될 거라는데, 저는 100번대거든요. 기다려봐야죠. 안 되면 좀 기다리다가 물건 팔고 돌아가는 사람들 자리에 허락받고 뒤이어서 팔아도 되고…”라고 했다. 여러 차례 판매 경험이 있는지 여유가 있었다.
서초구청 여성가족과에 따르면 벼룩시장 판매자의 50% 이상이 여성과 노인이다. 판매되는 물건 대부분은 오래된 옷이지만 의외의 물건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 벼룩시장이기도 했다. 부엌 찬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그릇 판매 아줌마, 라이터며 맥가이버 나이프, 오래된 인주 등을 들고 나온 아저씨, 자취방의 잡동사니를 끌고 나온 듯한 청년…. 물건의 종류는 시장에 늘어선 좌판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우리 옆에서 판매를 한 할머니는 바퀴가 달린 낡은 수레에서 인조 모피코트, 크기가 제각각인 운동화 여러 켤레, 이탈리아산 보온 물통, 대량으로 찍어낸 듯한 사기 항아리 두 점, 검정 봉투에 한가득 담아온 샴푸 샘플을 꺼내 늘어놓았다. 도저히 한집에서 나온 조합 같지 않아 여쭤봤더니 할머니는 “경기고 근처에서 청소 일을 하거든. 내가 여기 와서 장사하는 것을 아니까 부자들이 자기 집 물건을 나한테 줘요. 그리고 성당 자매님들도 물건을 내주고…”라고 했다. 할머니가 가지고 나온 물건 중 가장 안 팔릴 것 같던 항아리가 어느 아저씨에게 1만원에 가격 흥정도 없이 팔렸다. 샴푸 샘플도 한 아줌마가 5천원에 싹 쓸어갔다.
정서가 깃든 물건은 빛을 낸다
매주 장사를 나온다는 할머니가 전하는 장사 노하우는 이랬다. “남자들이 두말 안 하고 잘 사가. 낮 1~2시 정도에 손님이 가장 많고, 오전에는 구제 소매상들이 많아요. 생각해봐, 누가 주말 아침부터 중고 물건 사러 나오겠어. 큰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장사하는 사람들이고. 집에서 쓰던 소중한 물건들인데 너무 야박하게 가격 깎으려 들면 그냥 팔지 마요. 그래도 돼.” 과연 몇 시간 더 서 있다 보니 장사의 흐름이 보였다. △여러 손님들이 자주 들었다 놨다 하는 물건은 결국 팔린다. △정서가 깃든 물건은 보이지 않는 빛을 내는지, 판매자가 아꼈던 것은 말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관심을 보인다. △살 사람은 물건값에 상관없이 꼭 사간다. △새것이라도 계절과 상관없는 물건은 손님들의 관심 밖이다. △구제 가게를 하는 소매상들에게는 일반 손님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
낮 1~2시 사이에 물건 대부분이 팔렸다. 벼룩시장에 나선 첫 번째 이유였던 신발은 잘 팔리지 않았다. 사이즈 때문이다. 겨울 부츠 하나와 여름 샌들 두 개를 겨우 팔았다. 친구가 가지고 나온 자잘한 장신구며 소품은 인기가 많았다. 7천원에 내놓은 오래된 로모 카메라를 팔 때는 남자 손님 둘 사이에 경쟁이 붙어 자칫 싸움이 날 뻔했다. 작아서 내놓은 옷들은 금방 크는 아이들 옷을 벼룩시장에서 해결한다는 한 아주머니에게 팔려나갔다. 초등학생 딸에게 입힐 거란다. 2시30분께 장사를 접었다. 나는 3만원, 동행한 친구는 6만원을 벌었다. 따져보니 택시비와 장터에서 먹은 밥값으로 그날 번 돈은 그날 다 썼다. 돈은 안 남았지만 소중했던 물건들이 다른 이에게 가서 새 추억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배가 불렀다. 개중에 일부는 또 금세 버려지기도 하겠지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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