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8일 복원된 숭례문의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모양의 중앙 통로) 천장 사진이 공개되자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홍예문 천장의 용 그림이 만화 같고 조악하다는 지적이 핵심이었다. 12월30일 화재 사고에도 살아남았던 용 그림과 새로 복원된 용 그림 사진이 나란히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에 오르자 논란은 커졌다. 본디 있던 그림과 새로 그린 그림이 영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조악한 복원”이라는 비난이 문화재청과 복원 작업을 담당한 단청장 홍창원(58)씨에게 쏟아졌다.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으로 지정된 홍창원씨는, 단청장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던 만봉 스님의 제자였다.
하지만 ‘낮은 단가’ 의혹을 받았던 홍예문 단청 논란에 반전이 찾아왔다. 단청장 홍창원씨의 아들 홍재문씨는 인터넷 게시판에 복원의 기준점이 된 옛 용 그림의 흑백 사진을 올리며, “이번 숭례문 단청 복원에서 핵심은 조선 초기 단청의 복원이다. 숭례문이 조선 태조 때 완성된 초기 건축이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밝히고, “그때는 화려하지 않은 굉장히 수수한 단청으로 돼 있었다”고 반론을 폈다. 해명 이후 대중의 오해도, 의혹을 제기했던 트윗도 곧바로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 시민사회는 이번 논란으로 무엇을 배우면 좋을까?
일단 복원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홍창원씨가 담당한 숭례문의 단청 복원 작업은, 2009년 12월 발간된 에 의거해 진행됐다. 한국단청연구소(대표 홍창원)가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문화재청 수리기술과가 편집·발행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숭례문의 단청은 1954년·1963년·1973년·1988년에 복원 작업을 거쳤는데, 이 가운데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던 것은 1963년의 단청이라고 한다.
1963년의 해체 실측 자료를 기준점으로 삼은 홍창원씨의 단청 복원 작업도 역시 1966년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가 펴낸 등에 남아 전하는 1963년의 기록에 의거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숭례문은 현재까지 여섯 번의 단청을 시공했는데, 1954년 단청은 조선 후기 양식을 따라 화려함을 추구했지만, 1973·1988년 공사 땐 문양은 조선 초기 양식, 수법이나 색상은 조선 중·후기 양식으로 절충, 복원했다고 한다.
2009년 숭례문 복구자문단 단청회의가 이러한 연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1963년 단청 문양 모사가 ‘고식’(古式)으로 채색과 문양이 좋으며, 당시 적심과 구 부재 등에서 찾은 옛 단청을 바탕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역사적 타당성이 충분하다는 것. “1963년에 복원된 숭례문 단청은, 조선 초기 단청의 무위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단청과 조선 중기의 단청인 창경궁 명정전 단청 양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한국단청연구소 쪽은, 이번 복원 작업에서도 “수덕사와 명정전 등의 사료를 참조해 조선 초기의 양식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수작업 아니라 컴퓨터로1963년의 단청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이던 고고미술사가 임천 선생의 지휘 아래 김정태 선생이 단청 작업을 총괄 진행했다. 문양 작업은 한석성 선생이, 용 그림 등은 혜각 스님이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1973년의 단청은 만봉 스님의 전체 진행하에 아들인 이세환씨가 총괄했고, 1988년 단청은 문화재 수리 기술자인 김현규씨가 작업했다.
그렇다면 이번 복원 작업에서 사라진 용 그림은 문화재가 아닐까? “1988년의 복원 때 애초에 있던 1973년 만봉 스님의 초를 바탕으로 작업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홍창원씨는 “이미 해체 작업을 거친 뒤에 부재에 있던 용 그림은 박락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만봉 스님의 화풍이 남아 있던 1988년의 용 그림을 남겨두기 어려운, 재작업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뜻. “또 가급적 기존 자재에 작업해야 그림이 오래간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이번 복원 작업에 사용된 안료는 모두 11가지. 이 가운데 기둥에 칠하는 검붉은 갈색을 내는 석간주와 조개껍데기에서 나온 흰색 가루 호분 일부만 국산이고, 하늘색 계열인 삼청, 붉은색 안료인 주홍 등 9가지는 모두 일본에서 수입했다. 안료의 접착력을 높이는 매제도 아크릴 에멀전 대신 다루기 까다로운 아교를 사용했는데, 역시 양질의 아교를 국내에서 생산해내지 못해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
1988년의 단청이 남아 있던 부재의 그림을 따로 보존하는 일은, 문화재청이 복원 작업을 서둘러 진행하는 통에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천장 부재를 새로 마련하고 기존 그림은 따로 보존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점은 하나 더 있다. 1963년의 초를 옮기는 작업이 전통적인 수작업이 아니라, 어도비일러스트레이터(컴퓨터 프로그램)로 이뤄졌다는 점. 아무리 최종 작업은 손으로 한다지만, 어떤 문양을 베지어 곡선 도구로 옮기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기 십상이다. 대중이 문제의 용 그림을 놓고 ‘만화 같다’며 성을 낸 배경엔, 과도하게 정리된 선묘 탓도 없지 않다.
단청장을 닮은 용의 얼굴단청장은 이렇게 항변했다. “예전엔 원전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개념보다는 각 단청장의 화풍에 충실한다는 의식이 강했죠. 따라서 매번 다른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게 잘못이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시대가 그랬던 것이죠. 만봉 스님의 용 그림도 보면, 몸통 부분은 1963년의 것과 거의 동일한데, 세부에서 힘찬 개성이 드러나요. 특히 용의 얼굴 부분은 그린 이를 퍽 닮았거든요. 제가 작업한 용도 1963년의 것을 범본으로 삼아 충실히 옮겼지만 약간 다른 점이 존재합니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니, 그 평가에 대해선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로 복원된 용의 얼굴도 단청장을 많이 닮았다.
역시 가장 아쉬운 대목은, 시간이다. 숭례문 복원, 10년의 여유를 갖고 진행했더라면, 단청 안료와 아교의 국산화도 촉진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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