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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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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라, 연탄가스

겨울밤에 떠오르는 연탄의 추억
등록 2012-12-15 10:4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1980년대 겨울밤이었다. 연탄을 갈러 집 밖으로 나왔다. 요즘 에 나오는 명훈이라면 연탄을 바닥이나 강판에 대고 갈았겠지 만, 나는 별채로 떨어져 있던 보일러실로 갔다. 보일러실 한쪽에는 연 탄이 몇백 장 쌓여 있었다. 쌓을 수 있는 물건을 셀 때는 ‘장’을 쓴다. 연탄을 쌓아놓지 못하고 매일 한두 장씩 사다 쓰던 사람들도 있었는 데, 우리 집은 먹고살 만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연탄을 뺀 자리 뒤 쪽 벽에는 연탄 모양의 자국이 남아 있고는 했다. 연탄을 세로로 두 장씩 넣는 보일러가 아니라 세 장씩 넣는 힘센 보일러였다. 힘세면 뭐 하나. 방바닥은 몰라도 물은 미적지근했다. 수도꼭지를 틀면 초반 몇 초만 따뜻한 물이 나오고는 바로 찬물이었다. 게다가 따뜻한 물 나올 타이밍에 녹물이 섞여 나와 자연스럽게 철분 섭취를 하게 해줬다.

어쨌든. 어린 남일이는 겨울밤 보일러실 백열등 전구를 켰다. 연탄을 바꿀 때는 연탄 3장의 구멍을 모두 맞춰야 한다. 이러려면 연탄을 바 로 위에서 쳐다봐야 하는데 뜨거운 열기와 일산화탄소에 머리가 띵해 지기 일쑤였다.

그때도 머리가 띵했던 거 같다. 몽롱해지며 팔다리 기운도 빠졌다. 요 즘 연예인들이 맞는다는 프로포폴 느낌이 이런 건가. 그때였다. 백열 등이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낸 보일러실 구석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 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쭈뼛하며 고개를 들었다. 보일러 물탱크 위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야!’ 나는 연 탄을 갈다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집게를 고양이에게 휘둘렀다. 그놈은 도망가지도 않고 따뜻한 물탱크 위에 배를 깔고 누웠더랬다. 소심한 나는 결국 연탄 구멍을 제대로 못 맞추고 집으로 들어갔다.

시인이야 연탄재 차지 말라고 했지만 연탄재 놀이만큼 재밌는 게 또 어딨나. 벽에 대고 던지면 퍽 하고 뽀얀 먼지를 내며 깨지는 것이 흡사 에 나오는 전쟁 장면 같았다. 종종 친구놈 대갈통에 맞 기도 했는데, 재수없게도 연탄 질이 좋지 않거나 딱딱하게 굳은 연탄 재에 맞으면 엉엉 울어야 했다. 겨울방학 때 방바닥에 이불 덮고 누워 귤 까먹다 보면 연탄재를 수거하는 차가 전두환 시절 특유의 노래(뭐 더라. 기억이…)를 확성기로 질러대며 다가왔다. 다들 빨간색 ‘다라이’ 나 나무로 된 사과상자에 담은 연탄재를 들고 우우우 수거차량으로 달려들었다. 차에 걸터앉은 아저씨들이 먼저 받아주지 않으면 받아줄 때까지 연탄재 상자를 들고 따라가야 했다. 그 먼지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이들, 참 많았다. 1990년대 이전 신문을 들춰 보면 셋방에 살던 일가 5명이 죽는 것은 예사였다. 부부·자매·남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떴다. ‘겨울사신(死神)’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했다. 가정에서 식초만으로 연탄가스 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 가 신문 1면 머리기사를 차지하기도 했다. 1988년 5공 비리 청산이 시 작되자, 1981년 미국에서 저질탄을 수입하는 바람에 이듬해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증가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에는 값싼 연탄을 다시 사용하다 가스중 독으로 숨지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다. 겨울사신, 찾지 않을 테니 영원 히 어디로 좀 가버려라.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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