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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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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절씨구 노는 주부음주단

등록 2012-12-15 01:39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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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와잎의 전화. “언제 올 꼬야?”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릴 때는 경계경보가 상책인지라 ‘어따 대고 애교야!’라고 말하고 싶었지 만 그냥 “왜?”라고 물을 수밖에. 이유인즉슨 친한 에어로빅 언니들 저녁 먹는다고 오라는데 일찍 와서 애 좀 봐주면 안 되냐는 거였다. 회사 친한 형들 다 모였다고 오라는데 가서 날밤 까면 안 되겠니?

살 뺀다고 오전 에어로빅에 다닌 지 한 달째, 운동한다는 핑계로 대 놓고 술 드셔 뱃살만 더 나온 와잎에게 “운동하는 거 맞니?”라고 물 었더니 “현상 유지가 어딘 줄 알어?”라고 답했다. 그래 큰일 했다, 큰 일 했어~. 살이라도 뺐으면 아주 잔치를 벌일 기세로구나~. 마침 그날따라 술 먹자는 인간도 없고, 별수 없이 집에 기어들어갔다. 와 잎은 벌써 나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빠름~ 빠름~. 아주머니들 만나니 당연히 술은 안 마실 테고, 너무 늦지 말라고만 했다. 와잎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뺐다.

아들 녀석이랑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닌자고, 또봇 놀이를 해주느라 이리 맞고 저리 맞고 삭신이 쑤셨다. 노는 중간중간 아들 녀석은 엄 마 보고 싶어~를 추임새처럼 넣었다. 노는 데 정신 팔린 에미나이는 잊어버려~라고 복화술하는 것도 지쳐 결국 영상통화를 눌렀다. 한 참 만에 전화를 받은 와잎은 아뿔싸 벌써 불콰한 면상이었다. 와잎 뒤편으로 펑퍼짐한 아주머니들이 술잔을 들고 손인사를 했다. 아들 녀석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어디서 배웠는지 타령조로 “얼씨구~ 절씨 구~ 놀아보생~”이라고 말했다.

와잎은 언니들 장난 아니라며 좀만 있다 간다고 말했다. 니 얼굴이 장난이 아닌 거 아니? 그날 결국 와잎이 집에 들어온 시각은 새벽 1 시. 와잎은 되레 큰소리를 쳤다. 알고 보니 자기만 괜히 억울하게 살 았다는. 와잎이 털어놓은 얘긴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세상에 나만 이렇게 술 먹는 줄 알았는데 에어로빅 언니들한테는 잽 도 안 된다, 에어로빅 언니들은 매일 오전 운동을 마치고 점심께부 터 집에서 싸온 삼겹살과 쌈채소로 파티를 연다, 오전과 저녁에만 수업이 있는 에어로빅 원장의 허락으로 학원에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인다, 술자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밤까지 이어지는데 항상 나만 애를 보느라 집에 와야 해서 억울하다, 고 와잎은 정말 억울한 얼굴 로 말했다. 어쩐지 최근에 낮에 전화하면 잘 안 받더니만, 운동은 열 심히 한다더니 살이 더 찌는 이유가 있었구만~.

내가 “완죤 주부음주단이잖아~. 가정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알 코올에 빠져 사는~”이라고 말하자 와잎은 “어제 술 처먹고 새벽 3 시에 들어온 건 누규? 가정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알코올에 빠 져 사는 건 누규?”라고 응수했다. 그게 다 취재의 연장이야~.

지난 토요일 저녁, 평소 와잎이 먹고 싶다던 초밥을 먹이려고 관악 구청 부근 ‘코코미’로 향했다. 작고 예쁜 일본풍 스시집 코코미는 손 님이 많았다. 나가사키 짬뽕과 특초밥과 사케를 주문했다. 초밥과 짬 뽕 모두 훌륭했다. 신나서 사케를 홀짝이는 와잎에게 나직이 말했 다. 앞으로 에어로빅 언니들과는 낮에만 마시도록 해~. 꼬옥! 문의 02-872-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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