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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보고 식은땀 흘린 공황장애

등록 2012-12-28 14:3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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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크리스마스였다(고 해두자).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맡에 더 이 상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던 고1의 성탄절. 중1 때까지 그 자리엔 초 코파이가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별로 아쉽지 않았을 오 전(아들아~ 니 머리맡의 ‘닌자고 울트라소닉라이더’는 산타 할아버 지가 아닌 아빠의 피땀인 것이야~), 칠면조 요리는커녕 있는 반찬에 대충 밥을 먹고 친구한테서 빌린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빈 둥대며 읽었다. 오후가 되자 이렇게 X-MAS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 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아랫동네 ‘권시인’(904호 ‘연예인이 된 원시 인의 깔때기’ 참조)네 집으로 향했다. 목사와 전도사 일로 항시 바쁘 신 부모님 덕분에 늘상 우리들의 해방구가 돼준 곳이 녀석의 집이었 다. 그날은 다름 아닌 성탄절이었으니, 대목(?)인 그날에 권시인의 부 모님이 안 계실 것은 ‘나홀로 집에’처럼 자명했다.

띵동~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노인네(당시 권 시인의 별명)는 어디 간 거야?’ 마구 눌렀다. 띵동x4.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난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노인네야~ 엉아지~. 얼른 문 열어~.” 문 안쪽의 목소리는 살짝 떨며 또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난 짜증을 누르며 목소리를 깔 고 낮게 답했다. “누구냐고? 예수님이야~ 어서 문 열어.” 이윽고 “도 대체 어떤 녀석이냐?”며 문이 열렸다. 아뿔싸. 권시인의 아버님, 권 목사님이었다. 부자의 목소리가 비슷한 줄은 알았는데 이럴 수가. 고 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며 “저… ×× 친군데요”라고 했다. 권 목사님 은 마치 ‘니가 예수님이냐’는 듯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시며 방으로 가보라고 했다. 난 식은땀을 흘리며 권시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녀석 은 조지 마이클의 노래를 듣느라 내가 온 줄도 몰랐다. 성탄절 예배 를 마치고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오셨다가 예수님의 느닷없는 방문(?)에 얼마나 황당하셨을지.

그때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와잎과 결혼 전 내려간 고향 경기도 평 택. 눈이 많이 왔다. 우리는 2차를 마시고 3차 실내 포차로 자리를 옮겼다. 권시인이 주변 친구들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했다. 친 구 녀석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녀석은 내 전화를 빌려가더니 헤어진 첫사랑 여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만땅’인 배터리를 다 쓰고 들어왔다. 난 그날도 식은땀을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대흥역 ‘어물전’은 맛 좋은 회와 싱싱한 해 물이 일품인 숨겨진 맛집. 지난주, 와잎의 ‘망년회 타령’으로 을밀대 에서 저녁을 먹고 이곳엘 들렀다. 그나저나 매일매일 망년회 아니었 니? 광어와 꼬막, 소맥을 주문했더니 임연수와 이것저것 안줏거리 가 나왔다. 다른 횟집에선 안 나오는 귀한(?) 생와사비를 묻혀 간장 에 찍어 먹는데 맛이 꼬들꼬들했다. 그때 권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공황장애 와서 전화했어~.” 녀석에게 마음의 병이 있는 것을 알 았는데도 “뭐? 공항이라고?” 까불었다. 녀석은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전화에 긴박된 사이, 꼬막 하나에 소맥 한 잔씩을 들이붓 는 와잎(酒님)을 보며 난 식은땀을 흘렸다. 오 주여~ 내 공황장애는 어찌하오리까. 문의 02-3272-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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