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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이 부른 비명횡사

등록 2013-01-25 18:26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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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그날이었다. 2012년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일요일, 와잎이 말했다. “근데 우린 망년회 안 해?” 매일매일 니가 술 먹는 게 망년회 야. 그래서 지금 망하게 생겼고만~ 이라고 카톡 보내고 싶었다. 그 래 얼마 안 남은 ‘주객전도’ 마저 먹고 떨어져라~. 와잎은 서울 마포 역전회관의 바싹불고기와 낙지구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하여튼 야무지게 잘도 찾는구나. 눈길을 뚫고 처자식과의 망년회를 위해 역 전회관을 찾았다. 1962년 용산역 앞에 문을 연 역전회관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짬을 내 들러서 먹고 간 음식점에서 유래한 곳. 마포로 이전한 지는 꽤 됐다. 주문한 불고기와 낙지가 나왔다. 매콤 한 낙지를 먹고, 고소한 불고기를 먹으니 맛이 어울렸다. 와잎은 안 주만 먹지 말고 술도 먹으라고 난리였다. 그래, 먹자~ 먹어. 그날 우 리는 고기와 술을 야무지게 드셨다. 기승전결의 기(起).

새해 첫 해를 보자며 다음날 미래 사돈(916호 ‘유체이탈과 사돈과의 상견례’ 참조)과 함께 떠난 강원도 평창. 무슨 동해도 아니고 평창 숲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가는 길에 들른 마 트. 와잎은 2013년부터 급다이어트에 돌입할 거니까 오늘은 좀 먹어 도 된다며 또 고기와 술을 마구 쓸어담았다. 그런 다이어트만 안 해 도 살 빠지겠다. 오후에 도착한 평창의 눈썰매장. 아들 녀석을 태운 썰매를 이리 끌고 저리 끌고 아주 개썰매가 따로 없었다. 아들 녀석 은 신나 죽고, 아비는 힘들어 죽고. 기다리던 저녁 시간. 콘도에서 남 자들은 고기를 굽고 여자들은 상을 차렸다. 개썰매 끌고 먹는 소·돼 지고기는 참 달았다. 와잎은 그날도 고기만 먹지 말고 술도 먹으라고 개강요했다. 그래, 먹자~ 먹어. 그날도 개야무지게 드셨다. 승(昇).

그 주 수요일 아침, 드디어 10년 만에 재발했다. (뭔 병인지는 밝힐 수 없다. X기자가 익명이라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사람이다.) 와잎은 추저분한 짓은 혼자 다 한다며 개무시했다. 이게 술 먹고 고기 먹게 만든 니 때문이야~. 넌 내 인생의 차질이야 ~. 와잎은 역시나 아무 탈이 없다. 사람이여? 외계 생명체여? 전(轉).

나흘 뒤 회사 건강검진일. 제발 가라앉기 바랐던 ‘재발’은 더 ‘성질’이 났다. 이번에는 위와 대장 내시경을 해야 한다. 한 달째 낫지 않는 편 도선염과 재발 질환은 내시경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술 먹 으려고 건강을 챙기는 와잎은 이번에도 건강검진을 다 받아야겠다 고 난리를 쳤다. 추가 검진 비용만 50만원이 넘었다. 수면 내시경이 아닌 생짜 내시경으로 하면 돈이 조금 깎였다. 와잎은 자신은 절대 생으로 받을 순 없다고 방방 뛰었다. 생으로 받을 사람은 결국 나. 엉덩이를 까고 새우잠 자는 자세를 취하고 누우니 의자에 앉은 다 른 여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개쪽팔려서 눈깔을 희번덕하게 위로 올 렸다. 거기에 젤을 발라주며 다른 여의사가 물었다. “근데 왜 수면으 로 하지 않으세요?” 난 차마 돈 때문이라고는 말 못하고 “회사 선배 가 괜찮다고 해서 경험하고 싶어서요~ 헤헤”라고 말했다. 여의사는 “이제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더니 바로 들이밀었다. 재발된 부위가 외 마디 ‘비명’ 뒤 ‘횡사’했다. 아~ 제발~. 결(結). 문의 02-703-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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