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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감기약과 위기의 주부들

등록 2012-11-29 23:4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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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와잎이야. 내가 술 잘 먹는다고 오해들 하고 그러는데 오해 들 하지 마. 하루는 홍익대 앞으로 대학 동창모임엘 갔어~. 아들 녀 석은 남편 엑스한테 맡겼지. 엑스는 웬일인지 장소까지 추천해주며 순순히 애를 맡더니, 그럼 그렇지~ 술 좀만 먹으라는 잔소리로 기 분을 잡쳐놓더라구. “간만에 기분 내고 와~”라고 했으면 ‘세상 어디 에도 없는 착한 남자’였을 텐데, 넌 그냥 못난 남자야~.

엑스가 돼지고기 전문점을 권하길래 처음엔 “소고기도 아니고 웬 돼지? 이런 돼지 같으니라고!” 일축했어. 그랬더니 엑스는 “소고기 먹으면 뭐하겠노? 목 마르다고 소폭 마시겠지~. 소폭 마시면 뭐하 겠노? 헛헛하다고 소고기 사묵겠지~”라고 까불대. 돼지야? 재밌 니? 재밌으면 뭐하겠노? 마누라는 밖에서 더 재밌겠지~. 흐흐.

결국 대학 (술)친구 둘과 엑스가 추천한 ‘돈수백’엘 갔어. 분위기 좋 고 음식도 잘 나오더만. 우리는 수육 중짜에 만두를 시켰어. 엑스의 말처럼 수육을 시키면 돼지국밥 국물이 딸려나오더라구. 난 사실 감 기 기운이 있어서 술은 안 시켰어. 근데 갑자기 김미가 말했어. “왜? 소주에 밥 말아먹는 년이 술을 안 시키냐?” 야, 난 뭐 술 안 시키면 안 되냐, 내 얼굴에 소맥이라고 써 있냐? 넌 주문할 때 그럼 내 얼굴 들이밀며 “이것도 주세요~” 하냐? 술집 메뉴판에 내 얼굴 사진 붙 여놓지 왜? 손님들이 저거 주세요~ 하기 쉽게.

그리고 누가 소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유언비어를 날조하냐? 물론 밥처럼 술을 먹긴 하지만, 물 말아먹듯이 소주 먹는 여자 아니 아니 아니야~. 누굴 에 나오는 소주녀로 알아·물론 가 끔 주위에서 출연을 권유받기는 해~. 지난번엔 엑스가 나 몰래 출연 신청을 하려다가 발각돼서 새벽까지 술시중을 드는 징벌을 받았지.

돼지수육은 부드럽고 고소했어. 국물은 잡내가 전혀 나지 않는 진국 이더라. 소주를 부르는 국물이었어. 만두는 속이 알차서 하나만 먹 어도 든든하더군. 물론 하나만 먹진 않았지만. 안주를 먹던 임희가 어쩔 수 없다며 내 얼굴을 디밀며 주문했어. “여기~ 이거 주세요~.” 일하시는 아주머니는 ‘뭔 미친년들이야?’라는 표정이었어. 김미는 “니 얼굴 보고 왕만두 한 접시 추가 안 된 게 다행”이라며 골 질렀지. 니 터진 만두 한번 돼볼래? 암튼 살 좀 빼야겠어.

소맥을 말며 김미가 나직이 선창했어. “어차피 죽을 거 술 먹다 죽 자.” 우린 이구동성으로 “죽자!”를 외쳤지. 그렇게 대학 시절 삼선녀 로 돌아가는 동안 테이블엔 소주 3병과 맥주 8병이 쌓였어. 소맥이 들어가니 몸이 뜨거워지며 감기 기운도 간데없었어. 역시 약주야.

근데 기억이 나는 건 거기서 나와 2차 맥줏집을 갔을 때까지야. 그 이후론 말하기도 싫어. 어차피 엑스가 말할 테니 좀만 말하면 약 먹 고 술 먹으면 안 돼~. 돼지감기약이 따로 없어~. 떡실신한 나를 데 리러 엑스가 차 끌고 아들 녀석과 함께 홍대까지 왔다지 뭐야. 엑스 가 오자마자 그랬다나. “아주 위기의 주부들이시군요.” 다 감기약 때 문이야~. 그러니까 주폭마누라라고 오해하지 마, 마음만은 무알코 올이야. 문의 02-324-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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