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대학 동창 송년회에 가려고 가방을 싸는데 조카 준이 카톡을 보내왔다. “삼촌, 낼 서울 가면 술 사줄 수 있어?” 응, 내일 서 울 오면 술 사줄 수 있지. 그전에 야무지게 빠따 한 번 맞고. ‘뭔 예비 역이 술타령이냐?’라고 답을 해주려다 제대 뒤 고민이 많을 녀석을 생각해 토요일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내일은 알코올홀릭 와잎조차 술 먹자고 생떼 부리지 않는 마감일이었으므로.
토요일 저녁, 와잎과 아들 녀석을 데리고 조카를 만났다. 준이는 삼 촌과 오붓하게 고민 상담하며 한잔 마시고 싶은 눈치였겠으나 외숙 모 ‘스딸’을 아는지라 별말이 없었다. 준아~ 이제 결혼 잘해~.
상경한 외손자를 보고자 한 어머니까지 모시고, 보쌈과 막국수로 유 명한 서울 가산동 춘천옥으로 향했다. 와잎은 보쌈 대자, 국밥, 소맥 을 주문했다. 시어머니 앞이면 뭐하겠노? 돼지고기에 소맥 한잔 묵 겠지. 소맥 먹으면 뭐하겠노? 입가심으로 막국수 한 그릇 하겠지.
음식이 나오자 어머니가 기도를 하셨다. 어머니가 기도하는 동안 친 손자는 후빈 코딱지를 할머니 옷에 묻히며 까불고 있었고, 며느리는 안주와 잔을 보며 침을 삼키고 있었고, 전역한 군바리 손자는 여친 에게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기도가 끝날 타이밍은 정확하게도 맞춰 아~멘을 이구동성하는 센스라니. 할렐루야!
보쌈 고기는 적당한 육즙으로 부드러웠다. 보쌈의 생명이라 할 만한 김치는 감칠맛이 적당했다. 곁들여서 먹는 콩나물국도 시원했다. 어 머니도 맛있어하는 눈치였다. 준이는 여친에게 카톡을 보내느라 정 신이 없었다. 아주 카톡으로 날 새는구만. 집에서 카톡 보내지 왜 왔 느냐고 핀잔은 못 주고 “좀 먹으면서 하세요”라고 말했다.
유독 선지를 좋아라 하는 아들 녀석 때문에 주문한 국밥인데 아들 녀석은 먹지도 않고 와잎이 국물을 연신 떠먹으며 “살아 있네~”를 중얼거렸다. 술 들어가니 국물이 당기지? 아주 시어머니 앞에서도 살아 있네~. 국물을 먹어보니 멀건 국물 맛이 웅숭깊었다.
‘선주후면’의 느긋한 전통을 누구보다 몸소 실천하는 와잎이 그날따 라 막 서둘렀다. 술을 시키며 안주(보쌈)와 밥(국밥)을 동시에 시키더 니 중간에 막국수까지 막 주문했다. 술도 미리미리 막 시켰다. 무슨 난리가 쳐들어오냐, 막국수가 코로 들어가는구나~ 여기가 무슨 신 병훈련소냐 쫓기며 먹게. 시어머니 모셔다 드리고 집에 가서 본격적 으로 마시려는 속셈이 사람 잡는구나. 그런 상황에서도 막국수는 별 미였다. 직접 뽑은 듯한 중면에 열무김치 고명에 찬 국물까지. 춘천 옥은 막국수 하나만으로도 다시 올 만한 집이었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시작된 그날의 술자리는 호가든 한 박스, 큐팩 4개와 소주 2병을 다 해치우고서야 겨우 끝이 났다. 와잎의 무 차별 권주에 조카는 백기를 들었다. “이거 혹한기 훈련보다 더 힘든 데요.” 와잎이 말했다. “세상은 전쟁이야~. 청춘 차렷!” 내게 휴전은 언제 오냐고! 고민이고 뭐고 살고 보겠다며 다음날 오전 집을 나선 준이가 집 앞 쓰레기를 보고 한마디 했다. “근데 옆집이랑 쓰레기를 같이 버리나봐?” 그거 니 외숙모가 다 먹은 거야. 준아, 엄마한텐 비 밀이야. 문의 02-868-9937.
xreporter21@gmail.com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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