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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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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남편이 아니무니다~

등록 2012-08-15 07:42 수정 2020-05-02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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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다. 지금~ 이 순간! 와잎은 내 뒤 소파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다. 남편은 휴가 때도 일하느라 개고생을 하는데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만~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빈 술잔을 들며 술 가져오라는 시늉을 한다. “칼럼 연재하는 주에 휴가를 잡은 남편이 불쌍하지도 않냐”고 묻자, 와잎이 말한다. “니 얼굴이 더 불쌍한데~.” 아이고 내 팔자야~. 이건 휴가도 아니고, 휴가 아닌 것도 아녀.

사실 와잎이 휴가를 얘기할 때부터 몸서리났다. 집 나가면 나만 고생인 것을 모르지 않기에 와잎의 휴가 타령을 모른 체했다. 와잎은 먼저 미래 사돈이 괌을 간다며 같이 괌을 가자고 속삭였다. 난 전남 화순의 구암폭포나 가자고 말했다가 LTE보다 더 빠르게 날아오는 빈 큐팩을 겨우 피했다. 빠름~. 이윽고 와잎은 제주도를 가자고 했다. 난 재주도 좋다~ 재주도 좋아~라고 말했다가 진종오 선수보다 더 정확히 꽂히는 빈 캔맥주를 간신히 피했다. 빠름~. 와잎은 마지막으로 호텔 패키지를 가자고 했다. 난 따로 가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가 ‘1초’보다 빠르게 입 안으로 닥쳐오던 치킨을 받았다. 치킨이 내 목을 타고 넘을 때, 그렇게 여름휴가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와잎은 포기를 했는지, 그냥 집에서 맛있는 거나 사먹으며 지내자고 했다. 어차피 서울에서 술 먹나, 괌에서 술 먹나 먹는 술은 똑같지 않느냐면서. 난 갑자기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 집에 있는 게 나가는 것보다 편할 테고, 만약 와잎이 주폭을 벌일 경우에도 지형지물지인을 이용한 대응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 생각은 첫쨋날 아침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휴가를 앞두고 세게 마신 까닭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변신로봇을 들고 같이 놀자고 달려들었다. 난 니 아빠가 아니무니다~. 맨날 싸우는 놀이만 하는 아들 녀석과 식전 댓바람부터 땀 흘리며 놀아줬더니 위액까지 올라왔다. 아침을 먹자마자 와잎은 대청소를 한다며 설거지와 빨래를 하란다. 왜 꼭 내가 집에 있는 날 대청소를 하냐고! 난 니 남편이 아니무니다~. 급샤워를 하고 거실에 누워서 쉬려는데 올림픽 레슬링을 보던 아들 녀석이 갑자기 배 위로 뛰어들며 레슬링 흉내를 낸다. 난 사람이 아니무니다~. 오후가 되자 와잎은 술타령을 시작했다. 우린 동네 회사 선배 S부자와 함께 대방동 ‘서일순댓국’집으로 향했다. 순댓국, 채소순대, 오소리감투, 소맥을 주문했다. 채소 소를 넣은 순대와 푸짐한 고기가 들어간 순댓국이 야무졌다고 와잎이 말했다. 와잎은 선배와 신나서 소맥을 말았다. 난 순대 킬러 엄마 덕분에 아빠 다음에 배운 단어가 순대일 정도로 순대 좋아하는 아들 녀석 밥 먹이느라 제대로 맛도 못 봤다. 아들 녀석의 타박에 순대의 소에 들어간 채소를 빼내며 난, 이 시대 아버지들을 대신해 울부짖었다. “사무실 나가면 개고생이다!” 문의 02-3280-3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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