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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상태

등록 2012-07-26 15:08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 박미향.

몇 차례나 책을 손에서 놓쳤는지 모른다. 눈이 감긴다. 편혜영의 소설집 에서 ‘동일한 점심’을 읽던 중이었다. 소설은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말대로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하게 분절된 시간표를 지키며, 동일한 식사를 하고… 그래서 어떤 굴곡도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동일해지는 나날의 연속”을 보내던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대학 구내 복사실에서 일하는 그는 언제나 인문대 구내식당의 정식 A세트를 먹는다. 밥과 국, 세 가지 반찬을 담은 식판은 날마다 반찬을 바꿨지만 어제와 오늘, 지난주와 이번주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늘상 비슷했다. 그의 일상은 점심 식사를 기준으로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건조하게 묘사된 지루함에 취해 같은 문장 근처를 여러 번 맴돌다 안 되겠다 싶어 책을 한참 넘겼다. 다다른 곳은 ‘통조림 공장’. “여기 있으면 하루 종일 벨트 위로 속을 벌린 깡통이 돌아가는 걸 봐야 해요. …벨트 앞에 서서 그저 익숙한 각도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 몸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거죠. 왠지 뿌듯해요.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하아, 여기서도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그대로 아닌가. 그러다 생각해보았다. 매일 같은 점심을 먹는 사람, 매일 똑같은 각도로 몸을 움직이며 통조림을 만들고, 깡통 속 꽁치, 깻잎으로 밥을 먹고 다시 다른 통조림 귤이며 복숭아로 입가심을 하는 사람들을.

백수 시절, 막 회사를 차린 선배의 일을 잠깐 도운 적이 있다. 돈이 부족했던 그는 서울 신림동 고시촌 원룸에 월세를 얻어 사무실을 차렸다. 우리는 월세방 앞 고시식당 식권을 끊어 회사 구내식당 삼았다. 매일 점심, 비슷한 시간에 연이어 밥을 먹으러 가다 보니 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몇몇의 얼굴을 익혔다. 워낙 비슷한 차림과 표정이어서 종종 헷갈릴 때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늘 똑같은 한 끼 밥을 먹는 것으로 그는 어제의 낮과 오늘의 낮이 같음을 실감하고 오늘 밤과 내일 밤이 다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는 소설(‘동일한 점심’) 속 문장처럼 시험 날짜까지 달력에서 숫자를 지워가는 청춘들이 그 속에 있었다. 혹은 이런 문장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죽은 것을 상하지 않게 가공 처리하여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밀봉 기술의 핵심이거든요. 모두들 그걸 수상하게 생각해요. 상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거 말이에요.”(‘통조림 공장’)

백수였던 나는 달려나갈 목표가 있다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진심으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진공 포장된 깡통 속에서처럼 최선의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며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책장을 넘겨야 하는 일상은 청춘에게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그 식당에서 만난 이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많이들 꿈을 이루고 혹은 그 지루한 일상을 극복할 무언가를 얻었을까. 그렇게 되었길. 진심으로.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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