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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 <추적자>와 <유령>을 통해 본 한국식 장르물, 현실 서사의 귀환
등록 2012-06-21 11:32 수정 2020-05-03 04:26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당신이 지금 눈 뜨고 숨 쉬고 발 딛고 선 현실과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 뒤, 0과 1로 이뤄진 세계. 두 편의 드라마가 있다. 악에 받치는 현실을 좇는 SBS 월·화 드라마 , 그리고 또 다른 세상, 사이버세계에서 감춰진 증거를 좇는 SBS 수·목 드라마 .

이후, 장르물의 부활

(1971~89) 이후로 한국 TV 드라마에서 추리·수사물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권력에 의한 사회질서 유지나 악에 대한 응징, 범법자의 종말 등을 기승전결에 의해 수신교과서처럼 보여주어야 했던 한국 수사드라마는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회 통합 기능에 역행한다는 여론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권양현, )는 분석처럼 장르는 퇴화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드라마를 움켜쥔 것은 사랑의 서사였다. 멜로물, 가족극, 사극이 파이를 나눠가졌던 안방극장은 2000년대 들어 외국 드라마 시청자가 늘며 취향이 다양화했다. 특히 미국 드라마 흥행과 함께 범죄수사물이 대중화했다. 한국에서도 등의 드라마가 케이블과 지상파를 넘나들며 비교적 활발하게 한국식 장르물을 시도해왔다. 한국식 장르물이란 무엇일까. 멜로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드라마 , 미국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차용한 처럼 멜로와 서사의 드라마다. 그런데 현재 방영 중인 두 드라마, 과 는 달달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시청자의 바람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두 드라마 앞에 ‘시청률 1위’ 따위의 수사는 없다. 는 2012년 6월12일 기준 11.1%로 19.1%의 MBC 를 쫓고 있고, 은 2012년 6월14일 시청률 12.2%(AGB닐슨 제공)로 KBS (15%)의 뒤를 잇고 있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재기발랄한 멜로물을 성공적으로 그려온 ‘홍자매’가 극본을 쓴 KBS 과 30대 초반 여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온 김선아가 나선 MBC 가 두 드라마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드라마는 일반적으로 장년층 이상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었고, 수사물은 마니악한 지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장르들이 그동안 지상파에 안착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 를 필두로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멜로물 중심의 판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듯하다. 장르물의 플롯에 현실적인 서사를 더한 점이 눈에 띈다. 이것 또한 한국식 장르물의 특징이라면, 이들은 그 성취를 보여줄 수 있을까.

사이버수사물인 <유령>은 현실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도록 한다.

사이버수사물인 <유령>은 현실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도록 한다.


얼굴 바꿔 드라마에 등장한 현실
사이버수사물을 표방하는 은 이야기의 절반을 현실에 적극적으로 기댄다. 1회 첫 장면은 인기 여배우 신효정 자살 사건이다. 성접대 의혹을 받아온 신효정은 자신의 트위터에 “죽고 싶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이제 안녕”이라는 멘션을 남기고 11층에서 뛰어내렸다. 신효정의 멘션으로 네티즌과 트위터 사용자들은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를 살리러 달려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죽음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또한 상관없었다. 죽음을 말하는 멘션만 리트윗으로 무한 증식하며 그의 죽음을 공고히 할 뿐이었다. 성접대 의혹이 처음 나왔을 때는 ‘신진요’(신효정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가 꾸려졌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진정 진실이었을까. 그들은 사건의 본질을 벗어나 신효정을 악의적으로 다그치는 데 몰두했다. 어디서 본 듯하다, 이 장면. 시청자는 ‘신효정 자살 사건’에서 ‘장자연 사건’을 읽고, ‘신진요’에서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따위를 떠올린다.
픽션에 현실적인 문제를 세게 집어넣은 이유에 대해 을 쓴 김은희 작가는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우리가 이런 현실에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불신의 시대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언론이 우리를 정말 잘 이끌어나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면에 감춰진 진실이 있다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났을까, 몰두해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집요하게 진실을 찾아헤매는 이는 따로 있으니, 작가인 그는 작품 속에서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한다. 드라마는 ‘신효정 사건’을 둘러싼 연예인 성접대와 개인의 죽음을 넘어 거대 배후 세력과 또 다른 살인사건을 밝히려고 달려나간다. 사이버수사대 팀장 김우현(소지섭), 그의 경찰대학 동기인 인터넷 신문 기자이자 해커 박기영(최다니엘)이 사건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김우현은 죽고, 박기영은 진실을 밝히려고 김우현으로 페이스오프한다.
김은희 작가는 장르물이 한국 드라마판 안에서 아직 확실히 자리잡지 않은 점, 그리고 미국 드라마의 수사물처럼 제작비를 쏟아부을 수 없는 제작 환경 등을 고려해 현실 안에서 가능한 한국식 장르물의 최대치를 그린다. “개인적으로 서스펜스가 있는 드라마를 좋아하고, 그래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 김 작가는 여기에 시청자들의 요구를 더해 한국식 장르물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뭘 보고 싶어하는지를 고민했다. 처럼 한 편 그냥 놓쳐도 되는 시리즈도 재미있지만, 한국식 정서는 쭉 이어지는 이야기, 그 주인공을 응원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가 현실을 차용하고 있지만 ‘동시대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드라마는 많지 않다.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인 이 시청자를 붙잡는 힘은 이 동시대성에 기인한다는 의견이 있다. 최지은 기자는 “드라마에 쓰인 현실적 소재가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요소로 작용했다. 첫 회에서 여배우가 죽은 사건이 던져졌을 때, 시청자는 우리가 기억하는 사회적 불의를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에 ‘악플러’ ‘신진요’ 등의 소재가 더해지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전개돼 이것이 어떻게 해결될지 궁금증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가상 인물이 현실적인 이유?
이 현실과 사이버세계, 서스펜스와 멜로를 오가며 시청자를 배려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시청자는 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담을수록 진짜 막장 드라마라는 것을. 이것저것 뒤엉킨 채 굴러가는 것이 우리 사는 모습이라면, 드라마 또한 정치극인지 복수극인지, 수사물인지 하나의 장르로 정의 내리기 힘들다.
17살 어린 소녀가 죽는다. 소녀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온 형사다. 박한 경찰 봉급에 살림은 늘 빠듯하다. 평범한 아버지에게서 굳이 특별한 점을 찾으라면 유달리 딸과 사이가 좋다는 것이다. 한 달 용돈을 털어 딸의 친구들을 모아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선물을 사준다. 생일파티가 끝난 저녁, 딸이 죽었다. 뺑소니 교통사고인 줄 알았던 딸의 죽음 뒤에는 거대한 배후가 숨어 있었다. 돈과 권력에 결탁한 법은 딸의 죽음을 외면했다.
는 쫓고 쫓기는 이들의 드라마다. 백홍석은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려고 강동윤을 쫓는다. 유력한 대선 후보인 강동윤은 소녀의 죽음에 인기 가수 피케이준, 그와 밀회하던 강동윤의 아내, 그리고 그 사고를 이용하려던 자신의 야욕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백홍석을 뒤쫓는다. 그런 강동윤은 장인인 서 회장에게 늘상 쫓기는 처지다. 강동윤은 차기 총리직을 제안하며 대법관을 포섭하지만, 한 수 위의 서 회장은 자신의 요구를 위해서라면 걸핏하면 전화해서 잠자던 검찰총장도 깨운다.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은 늘상 ‘법대로 처리해’를 입에 달고 사는 정치권력에 의해 생의 중대한 요소들을 빼앗겼고, 정치권력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돈은 정치가를 겁박한다.
는 에서처럼 현실적인 소재를 끌어쓰진 않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현실의 극악한 면을 처절하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TV 평론가 윤이나씨는 두 드라마가 보여주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다. “에는 현실적인 소재가 차용되지만 사건 자체의 배경이 드러나 있지는 않다. 권력구조도 아직까지는 불투명하다. 왜 신효정이 죽었는지, 김우현 뒤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가 모호하다. 그 구조를 짜맞춰가는 데 의 재미가 있다면 는 반대다. 권력구조가 처음부터 드러나 있다. 자본과 정치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누군가를 압박하고 짓밟는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시청자는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하고, 확인한다. ‘그래, 저 사람이라면 저렇게까지 일을 저지를 수 있겠지’ 하면서.” 틀 자체가 현실적이기에, 만들어진 인물인 백홍석, 강동윤, 서 회장에 오히려 시시콜콜한 현실을 삽입하며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추적자>의 사건은 철저하게 픽션이다. 그러나 시청자는 정치와 자본의 결탁, 소시민의 일상을 겁박하는 권력의 야욕을 보며 오히려 현실적이라 느낀다.

<추적자>의 사건은 철저하게 픽션이다. 그러나 시청자는 정치와 자본의 결탁, 소시민의 일상을 겁박하는 권력의 야욕을 보며 오히려 현실적이라 느낀다.


그래서 더 잔혹한 이야기
두 드라마의 출발은 공히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첫 대사를 옮겨본다. “몇 시간 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접대 의혹과 관련된 루머로 힘들어한 탤런트 신효정이 죽고 싶다는 트위터 글을 올린 뒤 자택에서 추락해 숨졌습니다. 네티즌들은… 한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성접대 루머가 사실인지 성접대 리스트가 실재하는지 명명백백 그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검사고, 이 총이 판사야. 2012년 5월28일 밤 9시42분, 무슨 일이 있었지? 내 딸도 그랬겠지, 살려달라고. 근데 넌 어떻게 했지?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내 딸한테 넌 무슨 짓을 했지? 말해! 네 입으로! 이 세상에 말해!”()
이것은 결코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진짜 있었던 이야기, 혹은 진짜 가능한 이야기들. 굳이 지어내려 하지 않아도, 현실적이어서 더 끔찍하고 섬뜩한 서스펜스. 이것을 한국적 수사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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