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패션에 도통 관심이 없다. 입고 다니는 옷들도 대부분 누군가 선물로 주었거나, 추레한 내 꼬라지를 보다 못한 여동생들이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적선해준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집에 스킨과 로션이 떨어지면 그냥 얼굴에 살짝 물만 끼얹고 밖에 나가기 일쑤다. 돈도 없지만, 치장하는 데 영 소질이 없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시골 촌닭의 행색이랄까.
그러나 딱 하나 예외가 있다. 검정 가죽 장갑. 손에 가만히 가죽 장갑을 낄 때마다 기이하게도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팔뚝의 솜털이 저릿저릿 곤두선다. 그렇다고 특별히 가죽 페티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에 쫙 달라붙은 그 쫄깃한 자태에서 마치 페로몬 향내가 나는 양 가만 코를 박은 채 장갑 냄새를 그윽하게 시음하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걸 얼마나 좋아하냐면,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대명사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들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가죽 장갑의 살인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폴짝거리고, 장피에르 멜빌의 킬러들이 스크린 속에서 검정 장갑을 낀 채 간지 작렬하며 총질을 할 적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다’ 하며 주책맞게 탄복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다 가죽 장갑을 좋아하게 됐을까? 변변한 장갑 하나 못 낄 정도로 가난했던 유년기에 대한 복수일까, 아니면 오래전 짝사랑했던 머슴애와 어느 겨울의 새벽 내내 백야 같은 산책을 하며 기껏 떨리는 마음으로 훔치듯 잡았던, 그 도도한 장갑 낀 손에 대한 반사적 오마주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이 마비되는 ‘장갑 공황’ 증세라도 앓고 있는 걸까?
그렇듯 영문도 모른 채 한 10년, 검정 가죽 장갑 없이 겨울을 나지 않았다. 요즘처럼 겨울의 기미가 다가올 때면 장갑을 정성껏 닦은 뒤 눈에 띄는 곳에 신줏단지 모셔놓듯 전시해놓고 괜스레 뿌듯하게 훔쳐보곤 한다. 레몬과 바나나 껍질로 닦아낸 저 윤기 흐르는 도도함. 그리고 마침내 겨울이 되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얼굴과 옷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마치 타석에 나서는 야구선수들처럼 장갑 깊숙이 힘껏 손을 구겨넣은 채 출처 없는 자신감에 취한다. 장갑 때문에 내 자신이 무척 섹시해졌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동안 술 때문에 잃어버린 장갑도 부지기수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행이란 하나의 추악함의 형태이며, 대단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므로 석 달에 한 번은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처럼 술 때문에 석 달에 한 번꼴로 장갑을 바꾸는 신세도 있다. 지난겨울에도 아끼던 장갑을 택시에 놓고 내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 집에는 촬영하다가 구멍이 난 낡은 장갑 하나밖에 없다. 빨리 장만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통장 잔고를 분노의 눈으로 흘겨보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가죽 장갑에 대한 이 시원찮은 글로 원고료를 받아 겨울이 오기 전에 장갑을 살 수 있게 돼서. 신난다.
이송희일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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