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녀 문화(또는 동인 문화)라는 게 있다. 아이돌·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 문화상품을 ‘동성애’ 코드로 재배치해 팬들이 2차 저작물(‘동인물’ 또는 ‘야오물’)로 재창작하거나 이를 탐닉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대개의 경우, 성적 욕망의 주체가 여성(‘동인녀’ 또는 ‘야오녀’)이고 동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노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즘 10대 여성이라면 동인물을 직접 봤거나 또래 사이에서 동인녀를 접해봤을 정도로 제법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 동인녀 문화의 시초는 H.O.T로 대변되는 1세대 아이돌 팬덤 문화다. 그 시절 각광받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팬이 직접 쓰는 파생 소설, 즉 팬픽이었다. 팬픽을 통해 여성팬들은 ‘톤혁’(토니-우혁)이나 ‘준혁’(희준-우혁) 같은 식으로 ‘커플링’을 하며 가슴 설레 밤잠을 설치곤 했다. 이를테면 밤새 몸살을 앓던 토니가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깼는데 우혁이 침대 맡에 엎드려 자고 있다면, 토니는 아마도 이렇게 뇌까릴 것이다. “이 녀석, 날 지켜주었구나.”
최근의 현상을 팬픽 문화라 하지 않고 동인 문화라 하는 이유는 2차 창작과 향유의 저변이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년 어드벤처 만화 나 영웅 액션 게임 는 원작의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동인녀들에 의해 재해석된다. 또한 실제 재창작을 하지 않더라도, 원래 내러티브에는 없던 동성애 코드를 스스로 발굴해 상상하고 ‘오덕’ ‘씹덕’ ‘백덕’거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오타쿠 행동의 강도: 오덕심지어 주류 문화산업조차 1차 저작물 생산 과정에 ‘거의 의도적으로’ 동인녀 문화 코드를 배치하곤 한다. 예컨대 등에서 ‘BL’(Boys’ Love·미소년들 간의 사랑) 코드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이들 드라마가 지상파라는 매체 성격 때문에 이성애로 회귀하긴 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금기에 마주한 남자 주인공이 내면적 갈등을 겪고 마침내 극복하는 과정(“네가 외계인이어도 괜찮아. 갈 데까지 가보자”)은 BL물 같은 동인녀 문화에선 꾸준히 반복돼온 극적 장치다.
남성 동성애물을 보며 ‘우쭈쭈’ 하고 심지어 ‘하앍하앍’ 하다니 ‘이 무슨 변태들인가?’ 하고 이상히 여길 법하지만, 10대 남성들이 야동을 보며 성에 눈뜨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처음 접했을 땐 거부감이 들지만 왠지 자꾸 찾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과몰입하는 것과 같다. 또한 야동에 장르와 수위가 있는 것처럼, 동인물도 SM(사도마조히즘)급의 하드코어에서 ‘달달물’ 같은 소프트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 면에서 동인물을 종종 여자들의 포르노라 일컫는 게 틀린 말만은 아니다.
물론 다른 점은 있다. 동인물을 통해 성에 눈뜰 때, 10대 여성은 동성애적 관계를 목도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과정은 기존 통념을 넘어서는 (적어도) 세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오늘날 여성은 청소년기부터 남자를 대상화하며 성적 욕망의 주체가 된다. 둘째, 여성일수록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더 개방적이게 된다. 셋째, 과몰입하는 경우에는 (과거 ‘팬픽-레즈’처럼) 자기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할 개연성도 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동인녀 문화는 성정치 측면에서 굉장한 급진성을 보이는 셈이다.
어떤가. 만약 그녀들의 문화를 보고 ‘왜곡된 성’ ‘도덕적 타락’ ‘몹쓸 대중문화’ 같은 식의 생각이 든다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걱정해보길 권하는 바다. 동인녀 문화에 전복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기존의 남성성-여성성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역설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를 ‘공수법칙’이라 하는데, 동인물에선 사실 시각적 대상만이 남자들일 뿐 공격적인 ‘남성적 역할’과 수세적인 ‘여성적 역할’이 반복되곤 한다(종종 등장하는 성폭행 시퀀스도 사정은 같다).
결국 동인녀 문화란 전복의 쾌락을 미덕으로 삼지만 지배적 성역할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제시하는 셈이다. 마침 요즘 팬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룸을 들어서자마자 종현을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아쉽지만, 내동댕이쳐야 할 건 샤이니의 ‘총수’(어떤 커플링에서도 ‘수’ 역할만 맡는다는 뜻) 종현이가 아니라 바로 그 ‘내동댕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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