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개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부를 하다 보면 로봇이 된 기분을 느낀다.’ ‘이 세상엔 나만 혼자라는 기분을 느낀다.’ 이러저런 경로로 소외도 테스트를 할 때가 있는데 결과를 확인하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의미상실, 무기력, 학업소외, 고립감 등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5년 사이 청소년 우울증이 15.3%나 증가했고 우울증 증세 중 하나인 수면장애는 56.4%나 늘었다고 한다.
‘늘 외롭고 혼자라는 기분’을 요즘은 보통 우울증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관계나 애정관계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존재가 바로 10대 아니던가. 부모가 맞벌이라거나 여타 가정사라도 있으면 삶을 지탱해줄 끈은 지극히 제한적인 셈이다. 아이돌에 열광하거나 게임에 몰입하며 ‘가면’이라도 쓰지 않는다면 터널은 끝이 없다. 어쩌면 교과서의 ‘질풍노도 시기’란 말은 이제 ‘긴 터널의 시기’라고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 들어 왜 10대의 우울증이 주목받는 걸까. 명시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우울증이 자살 시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대개의 경우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어서 증세를 포착하기 어렵고 그 때문에 우울한 상태가 방치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무단결석, 게임·인터넷 중독, 비행, 학업부진 같은 문제에도 우울증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달리 청소년 문제에 대한 접근이 요즘은 정신의학 지식을 동원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우울증은 ‘요즘 애들’이라는 블랙박스를 열 때 일종의 만능열쇠 구실을 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면 그건 우울증 때문이고, 좌절하고 있다면 그건 우울증 때문이며, 심지어 공부에 흥미를 잃었더라도 그것 역시 우울증 때문이다.
이 열쇠가 예전의 만능열쇠들(가령 발랑까짐, 말세, 스트레스 등)과 다른 점은 구체적인 처방전을 작성하기 쉽다는 데 있다. 우울증은 병이니까 상담이나 약물을 통해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치유 절차는 비교적 어렵지 않다. 돈을 내서 전문가 상담을 받고, 거기서 유년기 시절의 트라우마를 확인한 뒤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려고 또래와 수다를 떨거나 운동을 즐기며 긍정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적잖은 10대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심리 상태가 우울증으로 진단되는 순간, 이 사회적 문제가 개인 문제로 둔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경제 공황(Depression)에 준할 정도로 사회구조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우울증(Depression)은 정신의학 지식에 의해 개인적 치료 대상이 된다. 자살을 하고 무단결석을 하고 인터넷에 중독되고 비행을 일삼고 학업이 부진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치유의 문제일 뿐이지 가족과 학교, 그리고 경제구조를 포함한 사회변동 문제로 상상되지 않는다.
좀더 강한 해석을 해본다면, 우울한 심리 상태를 우울증이라 명명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병으로 진단되기 이전의 우울(Melancholy)이라는 정서는 기본적으로 내가 진정 바라는 ‘욕구’와 사회가 나에게 강압하는 ‘요구’가 불일치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불만족 상태다. 달리 말해, 의미상실·무기력·소외감·고립감 등은 10대를 포함해 어떤 사회인이든지 간에 어떤 변화를 ‘욕망’하는 계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즉,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10대들의 잠재화된 어떤 정치성을 우울증이라는 과학적 언어로 축소하고 변환해버린다. 공부로 인해 로봇이 된 기분이 든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마땅히 책을 찢어버리고 책상을 밟고 일어나 시를 노래하라고 권유할 만도 한데, 수다를 떨든 운동을 하든 (물론 따뜻한 말로) 로봇이 되어 견디라고 ‘재-요구’하는 것이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이해하고 알아서 견뎌야 해, 라고 말이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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