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왼쪽)이 시민단체 활동가와 공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10대들은 ‘팸’을 만든다. 영어 단어 ‘패밀리’(Family)의 약자인데, 많게는 10명 이상씩 무리지어 친목을 유지하는 모임이다. 그래서 팸이라는 글자 앞에 ‘○○’ 등을 붙여서 자기 모임 특유의 취향이나 친분을 드러내곤 한다. 굳이 ‘○○팸’이라 명시하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유니폼을 만들어 입고 (스티커 사진이 아니라) 사진관에서 포토숍 이미지 사진을 찍기도 한다. 교실 안에서의 경쟁이 피 말리는 수준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 친구들은 나름의 추억을, 달리 말해 또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런 팸문화가 가출이라는 말과 만나기도 한다. 바로 ‘가출팸’이다. 가출한 녀석들끼리 모여 원룸이나 모텔 등 살 집을 구한 뒤 집단 거주하는 새로운 현상이다. 요즘에도 새벽녘이면 번화가의 24시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전문점에서 반(半)노숙하는 10대들을 볼 수 있는데, 그에 반해 가출팸은 엄연히 살 집(House)을 마련하고 그곳을 살 만한 집(Home)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다.
가출 청소년들은 왜 팸을 결성하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가출했는데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 가출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 지내게 될까. 교우관계가 제법 된다면 친구 집을 전전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서 숙식을 제공받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출 청소년 쉼터? 그렇지만 쉼터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니와, 그곳의 규율과 생면부지들과의 부대낌 등은 영 마뜩지 않다. 게다가 청소년 가출이 점점 많아지고 장기화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 바닥에선 갈 곳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나 채팅방에는 가출팸을 구하는, 가출팸을 만들자는 글이 속속 올라온다. ‘17남 재워주실 분’ ‘잘 곳 없어 힘드신 분들만 보세여’ ‘경기도 룸메 구하거나 남녀 무관 2명까지만 재워주세요’ 등등. 그러면 댓글을 달거나 대화에 응한다. ‘안녕, 너랑 동갑이라서 말 놓을게. 나 서울인데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 같은 식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사는 바야흐로 ‘가족의 탄생’이다.
이렇게 구성한 새로운 가족은 어떻게 유지될까. 이들한테 가출팸이 유용한 이유는 경제적 문제에 있다. 그런 까닭에 각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입 중 일부를 비교적 공평하게 모아 주거비를 해결한다. 또한 자유로운 가출 생활을 위해 모여든 녀석들이기에 이 자유를 유지하려면 나름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 설거지는 이틀에 한 번씩, 씻는 것은 여자 먼저, 청소는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세탁기에 빨래 돌리는 건 순번대로.
여기까지 보면 일견 대안적인 가족이라 할 법도 한데, 문제는 출가의 환상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경제문제다. 일자리가 없다면, 거기에 덧붙여 자유생활에 대한 희망 때문에 일할 의지도 별로 없을 때는 팸의 규범적 균형 상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미 몇몇 언론이 자극적으로 ‘혼숙’이라 보도한 것처럼 상당수의 가출팸이 4~5명의 남녀 동거 형태로 구성되는데, 돈벌이가 시원찮은 구성원한테는 성매매를 비롯해 금품 갈취와 절도, 폭행 등을 강요하기도 한다. 가족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가출팸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상징적 의미에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진짜 ‘집’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어서 고통과 환난의 굴레가 그치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좀 달리 해보면, 가출팸이라는 현상이 보여주는 진짜 아이러니는 좀더 구조적 차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정상 가족’ 신화가 이미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녀석들은 부유할 수밖에 없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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