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도서실에 자료를 찾으러 갔다가 눈에 띄는 제목의 소설을 보았다. 러시아 소설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 아니 이건 짝사랑하는 애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뇌었던 젊은 날의 일기장보다 더 부끄러운, 내 생애 첫 소설의 제목이 아닌가. 찾으려던 책은 잊고 소설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전에 읽었던 소설이다. 그때도 이 흔하디흔한 제목을 보고 ‘아니 이건 내 생애 첫…!’ 따위의 생각을 하며 읽었던 것 같다. 달라진 것이라면, 스무 살 때는 대가의 작법과 나의 비천한 문장을 비교하며 탄식을 연이어 내뱉었다면 이제 약은 사회인이 된 한때의 문학소녀는 칼럼에 써먹을 문장이 뭐가 있을까 빠른 속도로 소설을 스캐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감을 코앞에 둔 내 눈에 포착된 문장은, “그에게서는 잎담배, 살짝 구운 마른 빵, 포도주, 그러니까 불을 이용해 만들었거나 스스로가 불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마치 이바노프는 잎담배와 건빵, 그리고 맥주와 포도주만 먹은 듯했다”. 자, 이 문장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곰곰 머리를 굴리는데, 첫 소설의 여파 때문인지 칼럼 생각은 뒷전, 읽고 쓰고 맛보고 즐기던 20대 초반의 추억만 익어가는 빵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삼천포로 새보기로 한다. 학창 시절 나의 선생님들도 종종 수업 10분 하고 40분은 딴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전통도 없고 지금은 명맥마저 끊긴, ‘소설연구회’라는 서클을 통해 만났다. 여기서 우리는 나, ‘설탕’(얼굴이 백설탕처럼 하얀데다 말하는 새가 하도 달콤해서 그리 불렀다), ‘용’과 ‘젼’(여기서부터는 창의성 없이 각각 이름에서 따오거나 이름을 압축하거나. 그리고 행여나 궁금해하실 독자를 위해 나의 별명은 ‘맵’. 우리는 지독한 길치였는데 그중 내가 길을 제일 잘 찾았다. 나를 아는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비웃을 이야기)을 말한다.
어쨌거나 이 소설연구회는 교내 동아리로 등록되지 않았고 동아리방조차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는 언더그라운드 모임이었다. 우리 동아리방은 ‘학관’이라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건물에 있었다. 같은 과 동기 대부분은 이곳이 5~6층짜리 건물인 줄 알았을 테지만, 학관은 비밀스레 8층까지 품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7층을 지나면 좁고 가파른 계단이 하나 나오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면 다락 같은 공간에 세 개의 방이 나왔다. 하나는 인문대 그림 동아리방이었고, 하나는 철학연구회였던가, 뭐 그 비슷한 이름의 우리만큼 의심스러운 동아리가 쓰고 있었다. 그리고 801호가 우리 방.
우리는 이 방에서 그냥 읽기도 벅찬 소설을 ‘연구’하기 위해 꽤나 여러 시도를 했다. 예컨대 조식 모임.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데다 모두 사계절을 겨울잠 자듯 하는 체질을 타고나서, 일찍 만나 아침도 먹고 공부도 하기로 한 것이다. 집에서 안 쓰는 토스트기를 가져다놓고, 잼이며 밑반찬, 즉석밥도 가져다가 냉장고를 채웠다. 우리는 꼬박꼬박 모였다. 그리고 모임은 변질되었다. 식빵에 잼 발라먹으며 수다 떠는 모임으로.
한 번은 수업 과제로 소설을 써내야 했는데, ‘젼’과 나는 야심차게 합숙 창작을 하기로 했다. 컵라면과 과자를 싸들고 동아리방에 기어올라갔다. 그때가 가수 이소라 5집이 발매됐을 무렵인데, 밤새 니 이니를 키득거리며 따라 부르고 따위를 듣다 조금 울적해하며 맥주를 먹고 잠들기를 며칠, 그리고 다음날 수업에는 대지각! 소설 과제는 괴발개발에 여지없이 늦게 제출해 철야가 무색한 학점을 받고야 말았다.
어쨌거나 이 칼럼의 취지에 맞게 음식 얘기로 급마무리를 하자면, 우리는 이른 아침이건 한밤이건 계속 먹었다는 것, 10년이 지난 지금도 만나면 술 없이도 4차까지 갈 수 있는 위대한 위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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