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망가졌다. 예전에는 술과 담배를 엄청 처먹고 자도, 아침에 더 뽀얀 피부를 자랑(한다고 착각)하던 나였다. 그러나 요즘엔 아침이 두렵다. 일요일 오전, 술과 담배에 찌든 몰골로 거울 앞에 마주하는데, 와잎이 말한다. “참 못났다, 못났어.” 어제도 니가 먹자고 그랬거든? 근데 내가 봐도 거울 속의 사내, 참 못났지 싶다. 예전 ‘꿀피부’는 어디로 갔나. 알레르기가 생겼는지, 술(과 고기)만 먹으면 다음날 얼굴이 울긋불긋 독이 오르고 마른버짐이 피고 아주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특이하게도 그날은 입술 옆 가장자리가 하얗다. 어제 마신 맥주 거품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나? 자세히 보니 입술 옆이 튼 것이었다. 최근 너무 무리했는지 입술 양옆이 부르텄다고 말하자, 와잎이 휙 보고 말한다. “그러다 조커 되는 거 아냐? 캬캬.” 조커라, 남편 몸이 안 좋다는데 식전 댓바람부터 니가 아주 골을 지르는구나. 그래 너 만나서 울어도 웃는 얼굴인,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조커 됐다. 왜!
“먹기만 하면 뭐하냐, 나처럼 관리를 해야지.” 와잎은 염장의 종지부를 찍으며 고정식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굴렸다. 와잎은 정말 술을 먹기 위해 운동했다. 그렇게 술을 말아드시면서도 여전히 나름 동안을 유지(한다고 착각)한 건 오로지 운동 때문이었다. 1륜3음. 1시간 자전거를 타고 3시간 술을 마셨다. 풍륜이 아니라 ‘주륜’이었다. 때로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됐다. 자전거를 타면서 맥주 마시기. 운동하며 바로 먹으니 좋으니? 내가 경찰이라면 음주운전으로 체포하고 싶었다. 이건 뭐, 기인열전도 아니고. 너 안 나갈래?
운동을 마친 와잎이 말한다. “고기 먹으면 얼굴 빨개지니까, 을지면옥 가서 냉면 먹자.” 고양이 쥐 생각하는구나. 냉면 육수는 다시마에 멸치 넣고 만든다냐? 냉면이 뭐 잔치국수냐?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도 살짝 당겼다. 평일과 다르게 비 오는 일요일 오후의 을지면옥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우래옥·을밀대·필동면옥과 함께 서울에 있는 평양냉면 ‘4대천왕’으로 불리는 을지면옥은, 지난번 소개한 을밀대보다 더 심심한 육수와 얇은 면발로 이름을 얻은 집이다. 정통 평양냉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와잎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편육에 소주 하나, 맥주 둘.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건 왜일까? 근데 뭐 편육? 고기 안 먹기로 했잖아? “고기는 내가 먹을게, 자긴 무김치만 먹어.” 오늘도 당했군, 당했어. 아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먼. 그래 무김치만 먹고 난 사람 될 테니 넌 편육 먹다 돼지털이나 나라.
조커 될 때 되더라도 먹고나 죽자고 편육 몇 점을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고소하군, 고소해. 와잎은 냉면을 시켰다. 냉면 위에 편육을 올려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선주후면. 먼저 술을 먹고 나중에 냉면을 먹는 것이 이북의 손님 접대법이야, 라고 말하는데 와잎이 외친다. “여기요, 편육 하나랑 소주 하나 추가요~.” 면벽수도가 아니고 나 혼자 벽 보고 얘기하는구나. 시종일관 선주후주구나.
그래, 어차피 술만 말아드시는 와잎 두고 뭔 냉면 먹고 식은땀 흘리는 소리냐. 나도 냉면이나 먹자. 이윽고 한 젓가락을 뜨니 만신창이의 시름과 울긋불긋의 상처와 조커의 슬픔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냉면 마니아의 본능만 활활 타올랐다. 어차피 망가진 몸, 될 대로 돼라. 2주 연속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편육도 먹고, 소주도 먹고, 냉면도 먹고, 맥주도 먹고. 월요일 오전, 내 별명은 ‘붉은 코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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