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박미향
시작은 가볍고 즐거웠다. “심심한데 김밥이나 싸먹을까?”
냉동실에 남은 김 7장에서 출발한 김밥은 점점 덩치를 키워 김 추가, 밥 추가, 들어가는 내용물 추가를 거듭하며 그날 점심과 저녁, 다음날 아침까지 먹을 분량에 이르렀다. 다종다양한 김밥이 완성됐고 주방엔 폭탄이 떨어졌다. 주말에 만나는 남자는 지루한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며 말했다. “앞으로 무조건 외식이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왼손 엄지손가락이 계속 욱신거린다. 김밥 쌀 때 김발에서 튀어나온 나무 가시가 손가락에 박혔는데, 뽑아내고도 일부가 손에 남은 모양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메스로 찢고 세 바늘을 꿰맨다. 주말에 만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칭얼거리자 다시 선포하나니 “앞으로 무조건 외식이다!”
먹기 간편하고 맛있고 흔한 음식이다 보니 소설가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추억들이 있나 보다. 먼저 소설가 한창훈. 그는 (문학동네 펴냄)에서 할머니와 함께 김을 채취해 말리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여기에 덧대 원통형 김밥을 맨 처음 고안해낸 사람을 궁금해하기도 하는데, 그는 김밥도 처음에는 만두처럼 동그랗게 쌌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먼 길을 떠날 때 밀가루 반죽에 갖은 반찬들을 모아 싸넣은 것이 만두의 시작이므로, 김밥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김밥 발명자가 김밥을 길게 싸서 한입 크기로 잘라놓고 감탄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다음으론 소설가 성석제. 산문집 (창비 펴냄)에서 소설가는 김밥의 기본은 김과 밥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친구 L을 찾아 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 소풍을 갔는데, 이날의 메뉴가 ‘기본에 충실한 김밥’이었다. 그들은 새로 해 뜨끈뜨끈한 밥에 간장·참기름·소금을 넣어서 주걱으로 비비고, 본디 그 집 냉장고 안에 없었던 단무지, 김밥용 햄, 시금치, 당근, 게맛살 같은 것은 당연히 빼고, 마침 떨어져서 없는 달걀마저 빠진 김밥을 쌌다. 반찬으로는 김치 하나.
성석제는 그 맛이 아주 정결했다고 기억한다. “담백했고 김과 밥, 김치 각각의 본질적인 맛을 잘 알게 해주었다. …나로서도 처음 맛보는 귀족적인 것이었다. …그 김밥 이름을 보스턴 김밥. 아니 월든 김밥. 아니 소로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니 ‘소로 영감 김밥’으로 지을까 하다가 말았다.”
성석제의 ‘소로 영감 김밥’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김과 밥의 기본에 충실한 김밥으로는 충무김밥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방학이면 거제도에 사는 삼촌댁을 찾곤 했는데, 그 길에 맛본 충무김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육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배를 갈아탈 무렵이면 적당히 허기가 지기도 했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거제로 향하는 뱃길에 사먹을 수 있는 유일한 간식은 충무김밥이었는데, 막이 기가 막혔단다. 요즘처럼 접시 위에 김밥 반, 반찬 반 놓아주는 게 아니라 기다란 꼬치에 충무김밥과 어슷 썬 무김치, 빨갛게 양념한 오징어 무침을 졸졸이 꿰어줬단다. 꼬숩고, 약간은 비리고, 맵고, 달큰한 맛이 입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맛으로 조화했다고 한다. 언젠가 통영에서 ‘원조’ 간판이 숲을 이룬 가운데 아버지와 충무김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어린 시절 맛본 그 맛이 아니라고 했다. 조미료와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나는 원조라 주장하는 그 충무김밥도 충분히 맛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느꼈던 맛을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맑았을 바닷바람이 묻어서, 혹은 어린 시절의 짧은 여행에 대한 추억이 덧대어 맛있게 기억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하며 군침만 삼킬 수밖에.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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