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과 나는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가 쓴 ‘라면 문화 생각’(,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선생과 나는 이 문장을 공유한다. “‘라면’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어지는 문장들도…. “밥맛이 없을 때, 또는 지난밤에 지나치게 술을 마셔 속이 쓰릴 때, 또는 입이 심심할 때, 나는 라면을 끓여 먹는다. 파를 조금 썰어 넣고, 때로는 달걀을 깨 넣거나 하여 먹는다.”
다음부터 선생과 나는 점차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라면에서 두 가지 특징을 찾는다. 맵고 구수한 국물맛, 쫄깃한 면발에 대한 찬탄 따위가 아니다. 선생의 라면에 대한 성찰은 외국 기술 문명이 가지는 합리성, 규격품이 가지는 획일성에 대한 고민이다. 고민은 합리주의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인간의 생각을 옥죄는 획일성의 위험함을 염려하는 식으로 뻗어간다. 라면 한 그릇을 놓고 그는 “이 땅에서, 과거의 체험을 체험으로 인정하면서, 현재의 체험을 그것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살핀다.
나는 그냥, 내 수준에서 라면을 먹기로 한다. 선생 같은 수준으로 생각을 확장하자면 면발이 퉁퉁, 우동면처럼 불어버리는 지경에 이를 것이므로. 일단은 선생이 쓴 문장을 베껴 쓰기나 해보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파를 조금 썰어 넣고, 때로는 달걀을 깨 넣거나….” 그의 문장을 수준 낮은 방식으로 확장한다. 때로는 마늘도, 청양고추도, 김치도, 만두도, 떡도 넣어본다. 김현 선생은 규격품 라면이 가진 획일성을 걱정했지만, 혀의 감각으로만 놓고 보자면 이 강력한 획일성은 라면의 다양한 변주를 가능하게 했다. 어떤 재료를 섞어 넣어도 실패가 없다. 무엇을 넣어도 라면 본연의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획일성은 집집마다 개성 있는 라면을 낳는 데도 기여했다. 유명한 라면 가게의 레시피가 아니더라도 각 가정에는 내세우는 ‘우리 집 라면’이 있을 터. 나의 우리 집 라면이라면 ‘아빠 라면’이 있다. 연구자가 아님에도 평소 ‘연구를 해보자’는 말을 즐겨 쓰는 내 아버지는 요리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 지금은 집에서 국물맛이 일품인 샤부샤부를 만들어내고 개성 있는 드레싱으로 샐러드를 버무리지만, 아빠에게도 오로지 연구로만 그쳤던 암흑기가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로 일요일 점심을 이용해 요리 연구를 했는데, 그때 자주 등장한 것이 다양한(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방식으로 변형(!)돼 나오는 라면이었다.
미소라멘 따위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시절, 아빠는 남은 된장찌개에 육수를 붓고 라면을 끓여냈다. 이 된장라면은 조금 짤 뿐 꽤나 먹을 만했다. 그러나 국과 반찬을 섞어 비빔밥 수준으로 끓인 정체불명의 라면, 오른손·왼손으로 차갑게 비벼 먹는 라면이 뜨거운 국물에 흥건하게 빠진 채 식탁에 올랐을 때 우리 삼남매는 입에 지퍼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리 암흑기 시절에도 아빠에게는 비장의 라면이 있었다. 김치와 파, 계란을 넣은 라면. 누구나 끓이는 평범한 라면이 아닌가 싶겠지만, 포인트는 면이 퉁퉁 붇도록 끓여야 한다는 것. 비주얼은 떨어지지만 면에서 빠져나온 전분과 계란, 김치 양념이 만드는 진득한 국물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면발은 어찌나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는지. 이제 우리 집 요리연구가로 등극한 아버지가 ‘인스턴트 음식 따위는 내 사전에 없었다’며 잡아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이번 일요일에는 ‘아빠 라면’을 신청합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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