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머스트 해브인지는 모르겠으나 눈물 나게 고마운 탈것이다. 오토바이를 10년째 탔지만 스쿠터에 손대기 시작한 건 불과 지난해부터였다. 기어를 변속할 때 스로틀을 부드럽게 당기는 느낌, 체인이 하나둘 철컥철컥 감기는 그 느낌도 좋았을뿐더러 인생에 자랑할 것이 2종 소형면허 보유자라는 것밖에 없어서 오토바이를 10년째 타며 늘 스쿠터를 무시해왔다. 헬멧을 들고 다니면 고등학교 때 아는 형 오토바이나 몇 번 뒤에 타본 것 같은 녀석들이 ‘아, 스쿠터 타시나 봐요?’ 하는 게 싫어서 더욱 스쿠터를 멀리하고 살았으나 한 번 타본 다음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아, 좋은 게 좋은 거구나. 이래서 다들 타시는군요. 그냥 당기면 나가는 거, 이거 편하긴 편하군요.
멀쩡한 125cc 바이크가 멍하니 있는데도 스쿠터를 하나 장만한 게 꼭 1년 넘게 하고 있는 녹즙 배달 때문은 아니었다. 스쿠터에 한 번 꽂힌 다음 충무로를 어슬렁어슬렁 헤매다가 핑크와 흰색의 혼다 줄리오를 보고, 워낙 오래된 모델인데다 정식 수입이 아니라서 순정 부품도 구하기 힘든 것 다 알면서도 그냥 막 붙들었다. 두 바퀴를 즐길 수 있는 계절은 4월에서 10월, 딱 1년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탈 수 있는 계절에는 실컷 타고 타지 못하는 계절에는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이 오토바이의 매혹이다. 거창하게 매혹이 어쩌고저쩌고 늘어놨지만 사실 요즘에는 생활, 아니 생존에 필요한 것이 돼버렸다. 매혹이고 뭐고 요즘에는 그냥 어쨌거나 일하던 아줌마들이 막 그만둬버려서 원치 않게 매일매일 녹즙 더블헤더를 뛰고 있다. 지사장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지만 요즘 우리의 관계는 롯데 양승호 감독이 고원준 굴리듯 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꼴데’ 팬인 나로서는 양승호 감독이 고원준을 사실 아껴서 실전이 최고의 연습이다, 라는 철학으로 투입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으나 어쨌거나, 그런 요즈음에는 이 녀석이 없었다면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만둔 사람들 몫까지 배달하자니 도저히 걸어서는 못하겠고 매일 아버지 문병 가는 데도 불편해서 겨우내 박아둔 스쿠터를 수리를 맡겼지만, 스쿠터 수리가 끝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이제 아주 잘 나갈 겁니다, 하고 센터 청년이 건네준 열쇠를 꽂고 달리는 것이 아버지 수의를 가지러 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마지막 가시는 길도 장례 비용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생전에 입으시던 양복을 가지러 성산대교를 건너며, 몇 번이고 어디든 냅다 처박아버리고 싶었으나 시속 45km로는 쉽게 죽을 수도 없다. 그냥 몸만 버리고 귀찮은 소란만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묵묵히 다리를 건넜다 양복을 싣고 다시 돌아왔다. 토요일에 발인을 마치고 월요일부터 녹즙 배달을 재개했다. 센터 청년의 말대로 과연 스쿠터는 아주 잘 나갔다. 아버지 수의를 싣고, 그다음에는 녹즙과 아이스팩과 나를 싣고 이 유치한 핑크색 스쿠터는 묵묵히 달렸다. 이 예쁘장하고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핑크색이, 단종된 지 10년도 넘은 스쿠터가, 고맙게도 나를 아주 조금 구원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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