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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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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전쟁의 재구성’

잘라 모은 사진들에 네 줄짜리 시를 붙여 제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기록한

브레히트의 <전쟁교본>
등록 2011-02-18 11:19 수정 2020-05-03 04:26

“속임수를 강요하고 사람들을 혼돈에 휩싸이게 하는 시대라면, 사색하는 자는 자신이 읽고 들은 정보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거나 들은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함께 따라서 얘기해본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34년 ‘진실의 재구성’에 이렇게 쓰고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전쟁의 시대를 낮은 목소리로 여러 번 따라 읽는다.

93편의 ‘사진시’
(워크룸 프레스 펴냄)은 브레히트의 사진시집이다. 1995년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됐다가 절판된 뒤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다시 냈다. 동독에서 발행된 초판에 실린 69편 외에 2008년 개정판에 추가된 내용까지 총 93편이 실렸다. 독일어를 한국어로 바꿔 읽어주는 목소리는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 배수아가 맡았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남은 주인 없는 신발은 독일의 유대인 대량 살상을 소리 없이 은유한다. 워크룸프레스 제공

나치 강제수용소에 남은 주인 없는 신발은 독일의 유대인 대량 살상을 소리 없이 은유한다. 워크룸프레스 제공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망명해 반파시즘 활동을 한다. 남의 땅에서 제 나라를 비판해야만 했던 슬픈 시인의 작업을 돌이켜 상상하자면 이렇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는 자신의 조국이 괴물로 변해가는 수순을 사진과 글로 접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기록의 기록’을 해둘 만한 사진을 오려낸다. 사진마다 4줄의 주석을 단다. 그는 사진과 시를 결합한 자신의 작업에 ‘사진시’(Fotoepigramm)라고 이름 붙인다.

사진시 작업은 1940년 처음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1938년부터 쓰기 시작한 망명일지에도 드문드문 비슷한 형태가 보인다. 브레히트는 자신이 매일 기록하는 내용과 관련된 이미지를 골라 일지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1940년 8월4일 날짜로 쓰인 것이 지금 전하는 4행시 형태의 사진시의 시초로 추정된다. 해협의 상공을 나는 독일 폭격기를 찍은 사진이다. 기체의 머리에는 무시무시한 이빨이 그려져 있다. 브레히트는 다음의 4줄 시를 붙인다.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나는 상어라고 떠벌렸지/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한 해안을 향해 날아갔다네/ 비행기에 음산한 상어의 이빨을 그릴 때/ 적어도 분명한 건, 이번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였어.”(사진 82)

기록은 1940년부터였지만 내용은 그 이전의 것까지 포함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12년 동안의 사건을 다뤘다. 사진시집은 제2차 세계대전을 면밀하게 담는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장교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나치돌격대 대장 헤르만 괴링 등의 얼굴이 사진시집을 타고 흐른다(사진 1·25·28·69 등). 그러나 히틀러가 한 군수공장에서 연설하고 있는 사진은 그의 목소리가 사실 설득력이 떨어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히틀러의 뒤에는 커다란 대포가 놓여 있다. 브레히트는 사진 아래에 다음과 같이 쓴다. “지금 역사의 전환을 말하는 그자의 모습을 보라/ 그는 입으로 사회주의를 약속하고 있구나/ 하지만 보아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그대들의 손으로 만든 무기들/ 거대한 대포들, 말없이 그대들을 겨누고 있는.”(사진 23)

브레히트의 <전쟁교본>

브레히트의 <전쟁교본>

평화와 전쟁의 역설도 있다. 햇살이 내리쬐는 올리브나무 숲 아래에는 출격을 기다리는 독일의 폭탄들이 놓여 있다. 쌍둥이처럼 나란히 업무에 집중하는 두 명의 노동자는 어뢰의 실린더 부분을 공들여 손질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두 사진에 하나의 시를 붙인다. “올리브 나무여, 너 연한 이파리여/ 내 형제를 죽일 살인자들을 네 아래 숨기는구나. 너는/ 흰 두건을 쓴 채 그 작은 남자를 위해/ 폭탄을 용접하는 이 여인네들과 같도다.”(사진 72) 자신들의 일상이 전쟁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초록의 올리브 나무도, 노동하는 두 여인네도 알아채진 못했을 것이다.

신문 기사의 일부가 시로 전환되기도 한다. ‘기동화된 독일 교회’라는 제목을 단 짧은 기사는 전쟁 당시 독일에 이동식 가톨릭 교회가 38개에 달한다고 전한다. 자동차에 소형 제단을 장착해 교통 소외 지역을 돌아다니는 교회다. 대개는 신부들이 직접 운전사 역할까지 겸한다. 이들 교회는 오지의 작은 마을뿐 아니라 외따로 떨어진 곳에 주둔하는 군부대도 향한다. “오 복음이여, 신이 기동력을 갖추었도다!/ 히틀러가 치고 나오니 신은 뒤따르기가 벅차구나/ 신도 결국에는 기름이 떨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희망하노니, 신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를!”(사진 31)

시를 붙이지 않더라도 심장을 조이는 사진도 있다. 어쩌면 브레히트 또한 사진을 보았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므로 덩그러니 사진만 기록해뒀을지 모른다. 수천 켤레의 신발이 쌓여 있는 빈방. 많다 못해 일부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인다. 주인 없는 신발만 남은 강제수용소를 찍은 사진은 독일의 유대인 대량 살상의 증거다(사진 89).

한 편만 남은 시

덴마크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 브레히트는 다시 핀란드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스위스를 거쳐 동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48년 10월22일이다. 독일을 떠나고 15년이 지난 뒤다. 이듬해 그는 사진시를 그러모아 을 출간하기 위해 동베를린 문화위원회에 원고를 제출하지만 이런저런 수정 요구와 함께 거절당한다. 이후로도 그는 여러 차례 출간을 시도하지만 결국 은 그의 생 끝 무렵에 겨우 세상에 나온다. 1955년, 브레히트가 죽기 1년 전이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들은 사회주의자란 명목으로 금서 조처를 당했다. 한국에서 브레히트는 유명한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으로만 알려진 시인이었다.

이 ‘불온 작가’는 이어 도 기획했으나 의 출판에 애로를 겪은 만큼 다음 책의 출간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열을 지어 수업을 듣는 사진 아래에 그는 단 한 편의 시를 남긴다. “잊지 말아라, 너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싸움에 나섰다는 것을/ 너희가 지금 이렇게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그들이 아닌 너희가/ 홀로 책에만 몰두하지 말아라, 투쟁에 통참하라/ 그리고 배움 자체를 배워라, 그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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