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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예술품과 예술 아닌 것을 뒤섞은 설치작품으로 조형미술의 우상숭배적 가치를 해체한

마르셀 브로타스의 엉터리 미술관 연작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형상 섹션>
등록 2011-02-17 16:46 수정 2020-05-03 04:26

1968년 9월27일 금요일 저녁 7시30분, 40대 중반의 미술가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 1924–1976)는 벨기에 브뤼셀의 제 아파트에 엉터리 미술관인 (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ection XIXème Siècle)을 차리고 60여 명의 미술계 인사를 초청해 개관식을 치렀다.
의 구성은 꽤 소박했다. 유리창에 ‘미술관’이라는 글자를 부착하고 구석에 사다리를 비껴 세워놓았다. ‘취급주의’ ‘그림’ ‘위’ ‘아래’ 등 운송회사의 경고문이 스텐실로 표기된 작품 운송용 상자에는 작가가 같은 모양의 경고를 추가해 넣었다. 19세기 명화를 담은 레디메이드 엽서 50장은 벽면에 스카치테이프로 대충 부착했다. 여기에 해당 이미지를 벽면에 투사하는 슬라이드 프로젝터, 그리고 시야를 가리도록 창문 가까이 주차된 미술품 운송용 트럭이 전부였다. 개막식에서 흥이 난 브로타스는 즉석 연설을 했고, 뫼겐글라드바흐미술관장 요하네스 클라더스의 원고 낭독과 동료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후 4년간, 브로타스는 위치와 섹션 이름을 바꿔가며 11가지 버전의 미술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1972년 5월16일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 쿤스트할레(Städtische Kunsthalle Düsseldorf)에서 연 (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 Section des Figures)이 정점이었다. 이 작품엔 ‘올리고세부터 지금까지의 독수리’(Der Adler vom Oligözän bis heute)라는 부제가 붙었다. 올리고세는 점신세(漸新世)라고도 하는데, 지질시대인 신생대 제5기를 3개로 구분할 때 그중 세 번째를 지칭한다. 독수리의 먼 조상이 되는 원시 조류가 처음 지구에 나타난 때를 뜻한다.

1972년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 쿤스트할레에서 선보인 브로타스의 설치작품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형상 섹션>의 한 부분.임근준 제공

1972년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 쿤스트할레에서 선보인 브로타스의 설치작품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형상 섹션>의 한 부분.임근준 제공

은 박물관의 유물 전시 형식을 차용해 독수리에 관한 266개 품목(도판과 오브제를 합산한 수, 슬라이드는 제외)을 전시한 일종의 설치미술이다. 전시된 물품은 각국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 43곳과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한 것이다. 작가는 예술품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교묘히 뒤섞어 전시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처럼 명백한 미학적 사물과 화석·고서적·문장 등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사물, 그리고 상표·우표·키치적 잡동사니 등 공리적 사물을 망라했다. 각 품목 앞에는 큼직한 일련번호와 함께 독일어·프랑스어·영어로 번갈아 적은 ‘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This is not work of art)라는 글귀가 쓰인 가로·세로 5cm 크기의 명패를 놓았다. 두 권의 카탈로그도 발행됐는데, 제1권은 전시 개막에 앞서 제작됐고 제2권은 폐막 이후 제작됐다.

브로타스의 이 한시적 미술관은 ‘독수리’라는 권위의 상징을 다차원적으로 고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상징적 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한편, 전대의 조형미술이 지니는 우상 숭배적 가치를 해체했다. 동시에,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미술로 제시한 마르셀 뒤샹의 충격요법 또한 유효성을 상실했음을 입증했다(노년의 뒤샹은 “나의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미적 가치를 내재한 대상으로 독해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오브제로 구성됐지만, 전시 이후 해체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는) 오브제 미술의 맥락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후대가 브로타스의 미술관을 ‘설치미술’의 시원으로 꼽거나, 조사·연구 기반의 명작으로 상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술관 제도를 활용해 제도 비평을 수행하는 가운데 비언어적 형식의 입장 표명을 통해 당대의 미학적 논쟁에 뛰어든 셈이었으니, 1960년대 말 자크 데리다가 기존 철학에 가한 ‘해체의 충격’을 미술에 선사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브로타스는 어디까지나 초현실주의 예술가였고, 제 작업에 관해 말을 아꼈으며, 1976년 1월28일 자신의 생일에 52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떴다.

고인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보통의 미술관과 그 대변자들은 한 종류의 진실만을 제시한다. 나의 미술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진실의 조건에 관해 말한다는 뜻이다. 가공의 미술관이 미술의 메커니즘과 예술적 생애,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지는지 아닌지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나의 미술관을 통해 난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내가 그 대답까지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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