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이별해야 해.”
2024년 10월29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하남 교제살인사건’ 1심 결심공판에서 피해자 변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한 친구들의 메시지다. 피해자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단지 안에서 19일간 교제했던 남성에게 결별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이별을 고한 뒤 이를 친구들에게 알렸는데, 친구들은 그럼에도 피해자의 안전을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변호사가 친구들의 메시지를 법정에서 읽어 내려가자 방청석에선 울음이 터졌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피해자의 가족들은 피해자의 19번째 생일날 재판에 나와 양형증인으로 진술했다. 피해자의 친구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건을 알리고 시민들에게 연대를 요청했으며 방청석을 지켰다. ‘평균 이하의 지능과 정신병력’을 내세운 피고인은 정신감정을 신청했고, 사건 당시 피해자가 “자신의 외모(작은 키)와 부모를 비하해 환청이 들려 살해했다”며 책임을 돌렸다.
‘교제살인’은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에 의한 살인’ 가운데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교제하다 상대를 죽인 사건’을 의미한다. 2020년 오마이뉴스의 연속 기획기사로 알려졌다. 오마이뉴스가 2016~2018년 3년 동안 판결문을 통해 확인한 108명(여성 살해 한정, 남성은 2명)의 죽음은 같은 기간 경찰청에서 “51명이 숨졌다”고 국회의원실에 보고한 통계와 크게 달라 충격을 줬다. 정부는 기초적인 조사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교제살인을 방치했다.
정부가 공식 통계 구축을 미루는 사이 ‘한국여성의전화’가 2009년부터 15년째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언론 보도를 기준으로 정리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15년 동안 1672명, 2023년 한 해에만 192명의 여성과 주변인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수치는 최소치이고, 배우자 관계(과거 또는 현재의 혼인 관계, 사실혼 포함), 데이트 관계(과거 또는 현재의 데이트 관계), 기타 관계(상대방이 일방적으로 교제나 성적 요구를 하는 관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엄밀하게 보면 2023년 한 해에 49명의 피해자가 교제살인으로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경찰청도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에 의한 살인 사건을 범죄 통계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2024년 8월 발표한 ‘2023년 경찰청 범죄통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전·현 배우자, 사실혼, 전 애인(현 애인은 기존 분류에 포함)’까지 확장했다. 이에 따르면 2023년 살인 기수 여성 피해자 131명 가운데 64명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청 통계는 한국여성의전화 보고서 등과 비교해볼 때 보완해야 할 지점이 여전히 많다. 범죄 혐의를 기준으로 작성하는 통계라 살인이 아닌 다른 혐의로 분류된 교제살인을 포함하지 못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도 다각적인 분석이 부족하다.
국가가 공식 통계 구축에 손을 놓은 사이 교제살인은 2024년에도 계속됐다. 2024년 신상이 공개된 9명의 강력범죄자 가운데 4명(김레아, 박학선, 양광준, 서동하)이 교제살인범일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이지만 이를 개인의 일탈이나 불행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교제살인 피해자 유족, 지인들이 적극적으로 사건을 알리고 연대를 요청하면서 그 심각성이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과 정책적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된다.
2024년 연대활동을 하면서 교제살인사건 재판 방청을 가장 많이 했다. 결별한 연인을 스토킹하다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지자 피해자 집 앞에서 기다린 뒤 살해한 설아무개,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하던 연인을 특별한 이유 없이 살해한 류아무개, 결별을 원하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어머니에게 중상을 입힌 김레아와 서동하, 결별 통보를 이유로 연인과 그 딸을 살해한 박학선,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하다가 피해자가 연락을 피하자 집에 침입해 구타한 뒤 살해한 김아무개 등…. 너무 많이 죽었다.
교제살인범들은 재판에서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우발적 범행이며 살인의 고의가 없었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자극할 만한 언행을 했다”며 책임을 돌리기. 흉기를 이용했을 경우 자살·자해 용도로 구입했다고 둘러대거나 사건 당시 심신장애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사망한 피해자가 대응할 수 없음을 알고 피고인이 둘러댄 일방적 주장을 토대로 판결한 재판부도 있었다. 류아무개는 동거 중이던 피해자를 191회 찔러 살해했는데 수사·재판 과정에선 언급하지 않다가 양형 조사관에게 “사건 당시 피해자가 ‘너 정신지체냐’라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재판을 담당한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김신유)는 이를 토대로 판결문에 “피해자로부터 인간적 무시나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죽였다”고 적었다. 유족들의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다행히 2심에서는 형량도 늘어났고 범행 동기도 수정됐다)
피해자 쪽의 재판 절차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현재 1심이 진행 중인 한 사건은 심지어 검찰이 기소 뒤 피해자 유족에게 사건번호도 알려주지 않아 유족이 직접 검찰청에 전화하고 확인해야 했다. 과거에 비해 피해자 쪽의 재판 절차 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된다고 하지만 지역과 사건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통일된 기준이 없다는 의미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 직접 증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족에게 직접 사건 진행 내용을 확인하도록 하고, 사건 관련 증거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공개하며, 피고인의 일방적 주장에 대응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유족과 지인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울음을 삼키고, 욕을 내뱉지 않게 노력하다 끝내 폭발하는 이들을 법정에서 만난다. 언론의 관심은 빠르게 식는다. 재판도 결과만이 알려질 뿐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유족과 지인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그들의 삶이 어떤지 관심도 적다. 싸움 과정도 힘들지만, 싸움이 끝난 뒤는 더욱 허망하다.
그래서 더 법원에 가려고 노력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이 홀로 싸우게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유족 또는 지인과 소통하고, 변호사 연계, 방청 연대, 탄원서 모집,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재판의 경우 이렇게 시민들이 지켜보면 달라지는 게 보인다. 사건 번호조차 전달하지 않았던 검찰도 우리가 문제를 지적한 이후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양형증인 신청 및 채택 등 유족의 의견 진술 청취도 좀더 적극적인 형태로 변했다. 시민들이 모아 제출한 의견서나 엄벌 탄원서도 재판부가 무시하지 못한다. 시민들이 방청할 경우 재판 절차에서 소외감을 덜 느끼도록 모두가 언행부터 신경을 쓴다. 물론 재판의 실질적 변화는 아직 먼 길이지만.
국가 공식 통계 시스템 구축, 수사 절차 정비, 입법 보완, 양형기준 재설정 등 교제살인과 관련해 해야 할 일이 많다. 동시에 현재 진행 중인 유족, 지인들의 싸움도 함께 지켜봐야 한다.
동계 휴정기를 앞둔 2024년 12월20일 ‘의대생 교제살인사건’ 최아무개의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버지는 결심공판에서 무릎을 꿇었다. 휴정기 이후엔 더 많은 교제살인사건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하는 싸움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기 위해, 나는 또 법원으로 갈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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