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술가 재스퍼 존스(1930~)는 전후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꼽힌다. 하지만 그의 예술세계를 명징한 언어로 분석한 평문은 여전히 만나기 쉽지 않다. 작가가 이러저러한 비밀을 그림 이곳저곳에 숨겨놨고, 또 ‘누구도 이를 해석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자랑해왔기 때문에, 평자들은 아예 심도 있는 분석을 기피해왔다. 작가가 서거하면 비로소 진지한 연구가 시작될 테다.
존스의 대표작 가운데 으뜸은 미합중국의 국기인 성조기(Stars and Stripes)를 캔버스를 바른 합판에 그린 (Flag) 연작이다. 1955년에 완성된 첫 번째 은 화면에 가득 차도록 성조기를 그려넣은 것으로, 당시만 해도 회화라기보다는 물건에 가까워보였다. 일단 화판의 비례와 도안이 정확히 성조기의 그것과 일치했고, 또 캔버스 바닥을 가득 메운 것은 잘라붙인 신문지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예술적 혹은 반개성적 제스처로 독해됐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면 공을 들인 표면의 질감이 드러났고, 이는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이른바 ‘예술적 표현’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제목이 이니 언어적 해석도 흥미진진했다. 성조기를 규격에 맞춰 그렸으니 ‘깃발’임이 분명하지만, ‘물건 자체’로 깃발임을 주장한다면 ‘전통적 재현’으로 보기 어려워 알쏭달쏭했다. 그런데 왜 제목이 ‘성조기’가 아니라 ‘깃발’일까? 국가권력을 표상하는 우상적 기호에 대한 발언인가? 그렇다면 국기라는 표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비판적인가? 비판적이지 않다면, 이 작품은 애국적인가?
을 그린 재료를 살펴보면 작품 해석의 모호함은 더욱 증대된다. 존스는 신문 기사를 콜라주한 캔버스에 깃발을 그리면서 유화물감과 왁스를 사용했다. 가열해 녹인 왁스에 안료를 개어 그림을 제작하는 납화법(蠟畵法)은 로마제국령 이집트에서 유래한 고래의 기법이다. 그렇다면 성조기 그림을 굳이 왁스로 제작해 보존성을 높인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는 이에 관해 야릇한 에피소드를 제시해왔다.
“어느 날 커다란 미국 국기를 그리는 꿈을 꿨고,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나가서 재료를 사온 뒤 작업을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작품은 썩어빠진 그림이었는데, 정말로 썩었다. 가구에나 사용하는 가정용 에나멜 페인트로 그렸기 때문에, 그건 엔간해선 빨리 마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읽거나 들었을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납화법(wax encaustic).”
‘꿈에서 계시를 받아 그린 그림이 부패해서, 그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고래의 기법을 현대적으로 응용하게 됐다’는 식인데, 이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곤란하겠다. 동성애자인 존스는 작품에 성적 메타포를 과감히 구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미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다룬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화면에 잘라붙인 뒤 유화물감과 뜨거운 왁스를 사용해 성조기를 그리는 장면을 머릿속에 재연해보면, 어쩐지 변태적인 느낌이 든다. 성조기를 남근적 표상(phallic icon)으로 상정하면, 색색의 촛농을 그림 표면에 떨어뜨리는 작업 과정은 일종의 ‘회화적 사도마조히즘 행위’로 재독해된다.
존스의 첫 번째 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대표 소장품으로, 오늘날 20세기 현대미술을 표상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대접받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58년 첫 개인전(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출품됐을 때, 은 미국민의 ‘애국적 감수성’에 반하는 작품으로 간주됐더랬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이자 당시 명예 관장이었던 앨프리드 바는 존스의 데뷔전을 둘러보고서 미술관에 작품 소장을 추천했다. 미술관이 구매를 결정한 작품은 이었다. 그러나 바 관장은 과 의 구매를 거듭 주장했다. 결국 미술관 운영이사회를 주도하던 필립 존슨이 바의 청원에 못 이겨, 개인구매 후 기증 형식으로 두 작품을 컬렉션에 추가했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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