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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조장에 에스트로겐은 없었다

[입만 살아가지고] 도전, 발리와인 ② /
등록 2010-12-22 10:11 수정 2020-05-03 04:26

이제 이 문장을 지겨워할 독자가 있을 것 같다. “주방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넘치는 공간이다.” 기자를 때려치우고 주방에서 파스타를 삶은 미국 시사주간지 의 문학담당 기자 빌 버포드가 이렇게 말했다. 마리화나 줄담배를 피우고 주방 한켠 채소 더미에서 선 채로 섹스를 나누던 ‘마초’ 요리사 앤서니 보뎅도 에서 정확히 같은 표현을 구사했다. 주방이라는 공간의 정서적 공기는 무엇인가. 버포드와 보뎅은 그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마초주의.
썩 훌륭한 패러디는 아니지만, 나는 맥주 양조장은 ‘에스트로겐이 넘치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비유도 가능하다. 레스토랑 핫키친 요리사는 제 스스로 스톱워치를 체크하면서 50m 왕복달리기를 하는 스프린터다. 아주 짧은 시간에, 반복적으로, 순간순간 스스로 결단을 내리며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과감한 결단력, 재빠른 손놀림이 요리사의 미덕이다. 브루마스터(맥주양조 전문가)는 양궁 선수에 가깝다. 육체적 긴장, 근육의 폭발은 없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에, 침묵 속에서, 과녁을 맞혀야 한다. 섬세한 기억력, 꼼꼼함이 브루마스터의 미덕이다. 1차 발효를 끝낸 뒤 2차 발효에 반드시 넣어야 할 설탕을 제대로 넣지 않았을 땐, 그때까지 담근 술을 전부 버려야 한다. 섬세함과 기억력이 중요하다.

고나무 제공

고나무 제공

변명이 길었다. 독자들에게 사과부터 해야겠다. 2주 전 발리와인 원액 캔의 먼지를 닦았다. 당연히 곧장 캔을 따서 다음과 같은 조리법을 따라야 했다. 물을 끓인다 → 영국에서 수입한 몰트(맥아) 원액을 물에 푼다 → 효모를 뿌린다 → 발효시킨다. ‘내일 해야지.’ 귀차니즘에 굴복당했다. 난 꼼꼼하지 않았고 발리와인을 담가야 한다는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군가산점에는 결단코 반대하지만 군 복무기간만큼 호봉엔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 나 같은 얼치기 마초에게 에스트로겐이 충분할 리 없었다.

마감이 닥쳐 발리와인 캔을 땄다. 23ℓ짜리 1차 발효통에 미리 따라둔 생수가 찰랑거린다. 끓인 물에 발리와인 원액을 붓고 녹였다. 그 물을 다시 발효통에 부었다. 손바닥 반만 한 효모 봉지를 뜯는 것으로 조리법은 끝. 효모를 뿌렸다. 비스킷을 곱게 간 것 같은 냄새가 피어오른다. 주방에 있는 가장 긴 국자로 미친 듯이 저었다. 효모는 당을 이산화탄소와 알코올로 분해한다. 산소가 효모의 활동을 돕는다. 5분이 지나자 효모가 부글거리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는 생각이 효모처럼 부글거렸다.

맥주 담그기는 좋은 의미에서 에스트로겐을 필요로 한다. 발효통 뚜껑을 닫고 에어록(이산화탄소를 배출해주면서 공기 침투를 막는 도구)을 꽂으며 생각했다. 쓸모없는 맥주 담그기를 하고, 쓸모없는 맥주 담그기에 대해 쓸데없는 글까지 쓰다니 대체 뭐하는 짓인가. 이런 ‘저열한 자아 노출증’이 이제 지겹다는 생각이 부글거릴 때 내 안의 에스트로겐이 말했다. 친구들한테 내가 만든 술 한잔 주면 재밌지 않겠어? 맥주는 3주 뒤에 익고, 2주 뒤 닥칠 다음 칼럼 마감 때 나는 다른 요리에 도전한다. 혹시 발리와인이 익어간다는 사실을 3주 지나서도 꼼꼼히 기억하는, 에스트로겐 충만한 독자가 있다면 따로 맛 보여드리겠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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