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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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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편지

추리소설 형식에 하드보일드한 문장으로 연옥 같은 한국 사회를 비춘

신예작가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
등록 2010-12-15 14:30 수정 2020-05-03 04:26

부터 까지 한국 누아르 영화를 보고 있자면, 평소 한국 사회의 어두움에 주목하고 있다고 믿은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 영화들에서 한국 사회는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고 유린당하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 세계다. 내가 몸담은 세계의 ‘비참’을 확인하는 일은 처음처럼 늘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안온한 내 일상 너머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다는 서늘한 각성에서 비롯된다. 마치 영화 에서 운동권 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당할 때 흘러나오던 라디오 DJ의 경쾌한 음성 같은. 물론 폭력이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누아르의 장르적 속성을 감안하면, 영화 속 장면에서 과장과 비약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 세계에서 한국 사회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영화 같은 소설, 소설 같은 현실

신예작가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

신예작가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

(자음과모음 펴냄)는 누아르 영화처럼 연쇄살인범과 그를 쫓는 수사진, 그리고 사건을 밝히려는 기자의 구도를 통해 지옥과도 같은 현실을 냉정하게 출판그린 추리소설이다. 소설은 환락과 유흥의 도시 영흥시에서 가출소녀 남예진의 주검이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혼과 잇따른 질병으로 경찰 생활을 접으려던 정진우는 살인사건임을 감지하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수사에 나선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남예진과 오누이처럼 지냈던 김경만은 남예진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며, 정진우의 수사를 몰래 거든다. 한편, 개별 사건으로 보였던 사건은 사생활이 문란한 모터사이클 선수 곽태진과 승진에 목맸으나 물먹고 퇴역한 군인 정해일이 남예진과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연쇄살인으로 드러난다. 피해자 모두 합성수지로 만든 주황색 빨랫줄에 교살돼 숨졌고, 사체에선 마취제 프로포폴이 검출됐다. 그러나 지문이나 족적 하나 남기지 않는 범인의 치밀함에 수사는 난항에 빠져든다.

이때, 수사본부에 소속된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은희와 시사주간지 기자 유제두는 그들만의 ‘탐정놀이’를 통해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던 살인 현장에서 살인자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범인은 자신의 잣대로 피해자들을 징치하고 ‘처형’했다. 이윽고 범인은 ‘나를 찾으라’며 자신의 범행 과정과 목적을 담은 편지를 보내온다. 경찰이 편지 분석에 매달리는 사이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보육원 아동을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원장의 남편 한종성이 집 안방 장롱에 거꾸로 매달린 채 피를 다 쏟고 죽은 것이다. 범인은 피해자의 복부에 자상을 입히고 장 내부를 칼로 난자했고, 배꼽에 삶은 달걀을 넣는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 결국 경찰은 추가 범죄를 막는 한편, 범인의 인정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한 공개수사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모방범죄가 잇따르고 “죽어 마땅한 이들을 죽인 것”이라며 범인을 옹호하는 인터넷 카페들이 속출하는 와중에 연쇄살인사건을 특종 보도한 의 편집장 앞으로 살인자의 또 다른 편지가 도착하면서, 사건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긴박한 구성과 스타일리스트적인 문체
유현산

유현산

제2회 ‘자음과모음 네오픽션상’ 수상작인 는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긴박한 구성과 스타일리스트적인 문체로 시종 흥미진진하다. 경찰과 기자의 관계나 경찰 조직 내부의 속살, 부검 과정 묘사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의학 지식, 화재 현장을 진압하는 소방관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 등은 400쪽이 넘는 작품에 생생한 긴장과 또렷한 디테일을 부여한다.

저자 유현산은 10년 동안 의 편집기자로 일했다. 작가는 이 소설이 “시사주간지 편집실에서 보낸 세월과 그곳에서 품었던 의문들에 대한 고별사”라며, “나에게 세상은 스릴러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작가 스스로도 밝히고 있거니와, 는많은 대목에서 김훈 혹은 젊은 날의 김승옥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한다. 김훈과 조두진에 이은 재능 있는 기자 출신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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