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아닌가.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들은 국민의 입에 연일 오르내리며 ‘전쟁의 위협’으로 되살아났다. 한국판 12월호에서 안영춘 편집장이 말하듯 연평도 포격은 우리가 “60년 가까이 쉬고 있는 상태(휴전)임을 새삼 환기한다”. 한반도가 여전히 휴전임에 반해 세계 곳곳은 ‘전쟁’의 은유들이 가로지른다.
비합리적인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려라
게임의 룰과 주역이 달라진 국제통화 시장에는 ‘화폐전쟁’의 위험성이 도사린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며, 균형 잡힌 성장”을 약속했던 정상들의 목소리 뒤에는 상호 비방만 메아리처럼 따라와 국제통화 시스템의 약화를 불렀다. 미국 터프스대학 플레처스쿨 교수인 로랑 자크는 “환율전쟁의 주역들은 자국의 경기부양을 위해 은밀히 화폐가치를 절하하려 들지만 이는 다른 참가자의 평가절상을 부르므로 결국 제로섬게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강대국이 서로 치고받는 사이에 오히려 이득을 보는 쪽은 ‘캐리 트레이더’ 등 투기 자본이라는 것이다.
특집 기사는 연금법 개정을 둘러싸고 프랑스 정부와 노동자·청년들이 벌인 ‘전쟁’을 다뤘다. 퇴직 연령을 62살로 늦추는 것을 골자로 한 프랑스 사회당의 연금개혁안은 더 오래 일하고 (연금 계산 방식에 따라) 더 적은 연금을 수령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있다. 수백만의 프랑스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공장 노동자, 철도·운송 노동자, 교사와 학생까지 파업과 시위의 대열에 합세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영역의 종사자인 이들은 쉽게 뭉치지 못했다. 열정과 분노는 같은 온도로 끓어올랐지만 ‘조직’적이지 않은 그들의 연대 방식은 사분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의 에리크 뒤팽 기자는 개별적 이해관계로 인해 업종 간 연대가 쉽게 이뤄지지 않고 각 노조가 원자화해 흩어져버릴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아미앵 지역의 독립신문인 발행인인 프랑수아 뤼팽 역시 ‘하루 전 결정’ 등의 방식으로 곳곳에서 일어난 노동자 집회 사이에서 조직의 와해를 보았다. 자본은 오랜 시간 공들여 “‘개혁’ 일정을 짜고 지구적 차원에서 스스로를 조직해온 반면, 시위대는 조그만 도시 안에서조차 자신을 조직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현실을 자각한 일부 노조원들이 노조 연대를 꾸리기 시작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집회를 준비했다. 유인물을 돌리고 시위가 끝나면 회의를 하고 회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파업 소식을 알리는,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는 방식이지만 전례 없는 규모의 집회를 불러왔다. 이들은 세상의 질서를 헝클어뜨리며 사회적 균형이, 특히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임을 보여줬다.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프랑스 시민들의 궐기에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도 겹쳐 보인다. 1895일, 끔찍하게 오랜 시간. 모든 종류의 농성을 다 해보았다고 해도 될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이미 불안정 노동의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일부 학자들은 사내하도급을 ‘지주-마름-소작인’의 관계로 읽는다. “전근대의 근대적 재현”이 사내하청·용역·위탁·외주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한국 노동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수’ 노조에 희망을‘소작인’이 된 노동자는 실상 우리 가까이에 존재한다. 울산에서 공장을 점거한 채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부르짖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그들이고, 나이 많은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소노동자도 그들이다. ‘비정규직’의 테두리를 넘어선 ‘비공식’ 노동자인 알바생, 노점상, 과외 선생님, 가사도우미도 있다.
한 가지 환영할 만한 일은 비공식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세계적 추세임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청년 알바생과 ‘백수’들의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이 노조 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환영하고 싶은 일은 고용 불안이 해결돼 이들이 더 이상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게 됐다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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