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시민을 ‘폭도’라 부르고, 노동자의 파업을 ‘엎친 데 가뭄, 덮친 데 파업’이라 말하며, ‘복지병’ 운운으로 쥐꼬리만큼의 복지예산 증액도 용납하지 못하는 ‘1등 신문’을 보고 있자면, 분노와 함께 서글픔이 밀려온다. 같은 말을 쓰는데 어쩌면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아니 더 정확히 저런 자들과 같은 말을 써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비애. 흔한 비유대로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겠지만, 어쩌면 말은 그 생각을 강요하고 선동하는 무기인 것만 같다. 마치 제한된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처럼, 한정된 단어와 표현을 가지고 쟁투하는 인간들이 딱하다. 그러나 어쩌랴. 지난한 싸움은 결코 피할 수 없고, 우리는 다시 날카로운 칼을 벼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좌우 모두에서 드물게 인정받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시먼의 (웅진지출판식하우스 펴냄)는 지난 200년 동안 ‘반동파’(보수주의자)들이 그 싸움에서 어떤 말의 무기를 휘둘러왔는지 파헤친 책이다. 허시먼은 1980년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의 발흥을 보면서, 반동주의자들의 담론·주장·수사법과 같은 보수정치 언어 분석에 착수했다. 이것이 보수정치 이념 분석보다는 당대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더 주효할 것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프랑스혁명기에서 시작된 그의 논의는 19세기 보통선거권 도입 논쟁, 20세기 복지국가의 수립 시기를 넘나들며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논쟁을 통해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 가지 힘’을 도출해내는데,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가 그것이다.
말을 둘러싼 지난한 싸움먼저 역효과 명제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레토릭을 말한다. 즉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시도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이는 처음 추진됐던 목적과 정확히 반대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혁명이 공안위원회의 독재로, 더 나아가 나폴레옹의 독재로 귀결됐다는 점은 ‘자유의 추구가 압제를 낳는다’는 명제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서구의 오래된 속담은 이때 분만된 것일까.
허시먼은 참정권을 통해 정치적 평등을 추구했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특권적 지식인들이 보여준 역효과 명제들을 하나둘 소개하면서, 이로 인해 유럽에서 참정권은 거의 한두 세기 동안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갖지 못했다고 말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머리를 손질하거나 양초를 만드는 사람들이 국가를 지배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전제국가가 될 것이다.”
사회복지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역효과 명제는 “복지나 감세 혜택을 시행하면 모두들 그걸 받기 위해 자기 눈알을 파낼 것”이라는 말에 집약돼 있다. 이 논리는 오늘날 복지예산을 증액하면 다들 일 안 하고 놀려고만 하는 복지병이 생길 것이라는 말로 이어져오고 있다.
물론 허시먼은 선의를 가진 사회적 행위가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역효과 명제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주 거론된다는 점, 그리고 반동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실제 그런 역효과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용 명제는 “그래봐야 기존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김빼기 전략’이다. 1856년 토크빌이 이라는 책에서 “고문서 연구에 기초해, 행정의 중앙집권화, 소규모 자작농의 확산 등 떠들썩한 평가를 받은 프랑스혁명의 ‘성과들’이 실제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프랑스 인권선언’조차 “1789년 8월에 엄숙하게 선언되기 훨씬 전에 구체제하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제도화된 것”임을 입증했다. 당시 또 다른 유혈혁명을 치르고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프랑스 시민들은 이런 상황에서 “혁명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파레토의 법칙’으로 유명한 파레토의 논리를 통해 보통선거권과 민주적 선거 도입에 대한 무용 명제를 분석하는 대목에서, 한때 유행한 ‘일상적 파시즘론’의 그림자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체제로서의 파시즘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문화로서의 파시즘에 주목한 그 논의는 한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국보법 폐지한다고 극우반공 이데올로기가 없어지진 않는다”는 섹시한 주장에 혹한 우리는 아직도 국보법 치하에서 살고 있다. 허시먼은 이런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역효과 명제가 초보적 논리와 역설적 특징을 갖고 있다면, 무용 명제는 차갑고 상당히 세련돼 있다”면서도 “둘 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단순하다”고 지적한다.
위험 명제는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수사다. 가령 이런 식이다. “완전히 민주적인 제도들은 머지않아 자유나 문명, 어쩌면 그 둘 모두를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허시먼은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로 반동적 주장의 상당 부분, 그리고 중요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면서, 그에 비해 위험 명제는 “지배적인 여론 상황 때문에 정면으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펼치는 논리”라고 말한다. 우회하여 공략하는 방법이라는 의미다.
언제든 ‘어제’로 갈 수 있는 세계그는 “단순무쌍하고 독단적이며 완고한 표현이 반동파의 전유물이 아니”라면서 “진보주의자들도 그런 점에서 똑같이 행동한다”고 날카롭게 말한다. 책의 말미에서 허시먼은 보수의 수사학에 대응하는 대안으로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풍자성과 해학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너무 진지하고 점잖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회자되는 ’발랄한 진보’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허시먼의 책은 의외로 쉽게 잘 읽힌다. 내로라하는 서구 사상가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외의 소득도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오늘의 이 한심한 세계마저도 수많은 말의 싸움을 통해 어렵게 이룩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지난하되 즐겁게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언제든 세 가지 말의 힘에 의해 ‘어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는 점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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