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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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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리조토는 우유 섞은 누룽지 맛?

[입만 살아가지고] 도전, 리조토②
등록 2010-11-24 16:44 수정 2020-05-03 04:26

지배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어떤 공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적당히 소매를 걷고 허리를 돌려 왼손으로만 핸들을 돌리는 남자의 모습에서 여자들이 섹시함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간과 사물을 장악하는 느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도 되겠다’는 느낌을 줘서 근육의 긴장을 이완시키는.(쓰고 보니 ‘오빠 믿지?’ 같은 느낌;;)
파시스트나 남성우월주의자로 오해는 말아주시길. 앞의 문장에서 주어를 ‘사람’으로 바꿔도 된다. 가령 나는 중국집 오토바이가 늘어선 왕복 2차선 도로를 단 한 번의 접촉사고 없이 시속 60km로 질주하는 여성 버스기사님이라든가, 의 기타를 ‘지배’하는 장재인씨의 모습이라든가, 반쯤 소매를 걷고 후진 주차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보면 눈이 커지고 호흡이 빨라진다.

고나무 제공

고나무 제공

나도 섹시해지겠다, 주세페처럼. 박찬일 요리사의 (나무수 펴냄)를 펼치며 마음먹었다. 그러나 첫날밤 침대 앞에서 섹시하게 옷을 벗으려던 신랑의 목에 상의가 걸린 것처럼, 초장부터 ‘섹시함’은 어그러졌다. 큰맘 먹고 전날 사둔 파르미자노 치즈와 우유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뿔싸, 버터 4큰술이 필요했음을 책을 펼치고 깨달았다. 프라이팬을 막 달군 밤 10시.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찾은 편의점엔 버터가 없었다.

마가린 앞에 서서 고민하다 뒤돌아섰다. 이 칼럼 초기에 사먹은 명품 ‘이지니’ 버터가 생각났다. 이지니 버터의 맛을 기억하는 내 간사한 혀 때문에 마가린을 조금 쓰고 죄다 버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가린은 전혀 섹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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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유로 대신했다. 적당히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둘렀다. 양파를 넣자 금세 기분 좋은 매운 내가 피어올랐다. 왼손에 책을 들고 연방 조리법을 흘깃거렸다. 자, 다음엔 쌀을 팬에 볶습니다. 160g, 이라는 수치가 대체 밥공기로 얼마쯤인지 내 손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어림짐작으로 쌀을 붓고 우유 반컵을 또 부었다. 우유는 거품과 함께 금세 크림치즈처럼 끈적하게 쌀을 덮었다. ‘난 이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부엌을 끈적하게 덮었다.

미리 준비한 닭 육수를 우유가 자작해진 쌀더미에 부었다. 리조토 레시피에는 책에 안 나온 게 하나 더 들어간다. 인내심이다. 박 요리사의 조리법대로 20분간 육수를 붓고 저었고, 졸아들면 다시 붓고 젓기를 반복했다. 눈대중으로 넣은 쌀은 서서히 불었고 15분 뒤 프라이팬은 공깃밥 네 공기 분량으로 부풀어올랐다.

마지막으로 파르미자노 치즈 2큰술을 잘 비볐지만, 이론(조리법)과 현실은 달랐다. 한 번 끓인 누룽지를 이틀 뒤 우유를 넣고 다시 끓인 맛이랄까? 적당히 고소하고 적당히 우유 맛이 났으며 쌀을 볶아서인지 적당히 씹히는 질감이 났지만, 결정적으로 매우 싱거웠다. 고추장아찌와 곁들여 먹어봤다. 곧 뱉어야 했다.

난 쌀과 닭 육수와 파르미자노 치즈를 지배하지 못했다. 재료에 지배당했다. 조리법도 지배하지 못했다. 중요한 재료인 버터를 사놓는 것도 깜빡했다. 부하 중 어느 한 명도 명령을 듣지 않는 무능한 독재자라도 된 기분. 난 섹시하지 않았다. 힙업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실은 힙업도 아닌 벨리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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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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