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역사책은 숨겨진 천재들이 있다고 말한다. 악보 없이도 피아노를 치고, 공식 없이도 난해한 수학 문제를 푼 사람들은 대부분 독보적인 삶을 살다 간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남’과 ‘사회 통념’을 의식하는 순간 그런 천재들은 자기만의 빛나는 재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도 그렇다. 타인의 눈에 길들여지고 칭찬 없이는 어떤 춤도 출 수 없게 될 줄 알면서도, 점점 타인의 시선과 맞장구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토록 타인의 시선이 넘쳐나는데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나 보다. 지금도 인간을 닮은 가짜 형상을 만들어 거리 곳곳에 세워둔다. 동공 없는 눈을 만들어 밋밋한 눈이 우리를 감시하도록 하고, 근육 없이 물컹한 두 팔을 벌리게 한 다음 교통질서를 책임지는 질긴 반복 노동을 시킨다. 친구 한 명은 이렇게 내 호기심에 응답했다. “정말 바늘로 찌르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닌 허약한 형상이잖아. 그런데 막상 깜깜한 밤에 도로에서 마네킹을 보니까 화들짝 놀랐어.” 싱싱한 목소리가 전하는 뜻밖의 감정, 그날 밤 가짜 경찰은 방심한 운전자에게 겁을 주는 데 모처럼 성공한 것이다.
경찰 마네킹의 성공이 놀라운 것은 그만큼 거리를 지키는 경찰 마네킹들의 외관이 허술하기 때문이다. 나도 요즘 서울 용산역 근처에 있는 가짜경찰관을 가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길 한 모퉁이에 서있는 마네킹은 첨단 로봇도, 쇼윈도 조명을 받은 마네킹도 아닌 3D 노동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급하게 만든 허수아비처럼 헐벗은 몸에 누가 옷이라도 잘 입혀주면 좋겠다 싶을 만큼 그의 행색은 초라하다. 예민한 경찰관이라기보다 남루한 거리의 부랑아처럼 보이지만 제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황색 봉을 들고 위아래로 두 팔을 부지런히 내렸다 올렸다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동네 곳곳에 매달려 있는 감시 카메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의 기술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무섭다. 그런데 인간 형상을 어설프게 흉내 낸 허술한 디자인으로 우리를 감시하겠다는 경찰 마네킹은 얼마나 허망한 꿈을 가진 것일까. 이 경찰 마네킹은 인간이 품었던 인조인간에 대한 욕망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기계 기술이 일상생활에 침투한 1920년대에는 기상천외한 과학자들이 인조인간인 로봇을 만든다는 이야기의 영화가 속속 제작됐다. 영화에 등장한 로봇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울기도 하고 괴팍한 성격을 으스대는 등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미래에서 왔고, 인간을 능가하는 최첨단 노동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 남아 있는 경찰 마네킹의 노동은 인간이 면피하려는 과거에서 온 반복 노동의 스타일이다. 작가 최정화가 땅에서 끌어내온 가짜 경찰 마네킹은 어떤가. 작가는 쓰임을 다하고 땅에 파묻혀 있던 경찰 마네킹 일부를 직접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이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지금은 국도에서 사라진 푸른 유니폼의 경찰 마네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1990년대 도로 곳곳에 세워졌다 퇴장한 마네킹은 20세기 초 공상과학(SF) 영화와는 정반대로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온 인조인간이다. 네모난 몸통을 가진 이 아저씨는 고속도로와 국도 곳곳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겁을 주던 권위의 아이콘이었다. 이제 감시·훈육·겁주기 등 경찰이 지시한‘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아저씨는 낭만을 좀 아는 것 같다. 작가 최정화가 꾸린 이태원의 독특한 문화공간 ‘꿀풀’의 높지않은 옥상에 가면 바람 냄새 맡으며 정면을 바라보는 이 사내를 만날 수 있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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