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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날아간 비둘기 풍선

너의 ‘상징’이 필요해
등록 2011-08-12 16:59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류우종

한겨레 류우종

비행기에서 쓰는 ‘너의 의미’. 지금은 승객을 잠재우는 시간,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덜커덩 소리가 나는데 승무원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맨 뒷자석에 앉은 나는 이 비행기가 수직·수평의 댄스를 멈추고 무사히 착륙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 마이 갓. 재난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그러다 비행기처럼 하늘에 있는 사물을 떠올려본다. 나에게 지금 잠시라도 필요한 건 평화의 이미지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지금 같은 어둠과 불안만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하늘에는 투명한 구름도, 빛도 있으니까. 여기에 더해 평화 기원의 임무를 맡고 하늘로 발사된 수많은 사물들도 있다. UFO와 전투기도 때로는 ‘평화’ 프로젝트로 포장되지만 일단 작고 위태로운 사물부터 생각하고 싶다. 신문에서 본 비둘기 풍선은 어떨까. 지난 6월 중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서 비둘기 모양의 풍선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회색 옷을 입은 수녀들이 비둘기 모양의 풍선을 날려보내는 동작은 어린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듯 들떠 보였다. 남북평화를 기원하는 손짓에 풍선, 그러니까 가짜 비둘기들은 푸드덕 하늘을 날았다. 마치 진짜 새라도 되는 양.

비둘기는 어찌된 영문인지 평화의 상징이 됐다. 고대부터 비둘기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런 의심에 답한다. 짜증과 분노 기질을 유발하는 담낭(여기서 나온 담즙)이 비둘기에게는 없다는 증거부터, 기독교 성경의 대홍수가 끝났음을 알리러 날아오는 대목까지 회색 비둘기는 백색 평화로 은유되었다.

통통하게 빚어진 흰 비둘기 풍선은 수십 년 동안 대북 선전물 ’삐라’를 보내온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특산물이다. 6·25가 가까워지면 거대한 풍선 삐라를 북에 날려보내는 이가 여전히 많지만 비둘기 풍선은 싸움이 아닌 화해의 제스처를 표한다. 평화라는 꽤나 묵직한 주제를, 만화를 많이 본 사람이 며칠 고민하다 가볍게 디자인한 관광 상품 같다. 서울역의 실제 비둘기들과는 거리가 멀다.

비둘기 풍선은 바쁘다. 겨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던 날에도 평창 하늘을 날았고 때때로 희생자들을 위로하려고 기념탑 주변을 날기도 한다. 중국 및 국내 이벤트 물품 판매 사이트에 가면 값싸게 제작된 비둘기 풍선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하늘 위의 풍선 비둘기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하얀 비둘기 그림과도 닮았다.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한 피카소는 제 애인의 얼굴은 마구 비틀어 도깨비처럼 그렸지만 비둘기만은 비둘기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놓았다. 북한군은 휴전협정 조인식 건물의 벽을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으로 채워 평화의 상징임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계획을 성사시키진 못했다. 어디가 평화의 나라이고 어디가 아닌지 하늘에서 내려다본 비둘기는 알고 있을까. 얇디얇은 비닐 풍선이 고공으로 날아간 이후 평화 메시지를 전달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느 쪽의 누구든 비둘기가 아니라 비둘기의 ‘상징’이 필요하다.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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