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소개된 ‘구석기 식단’을 보면서 든 생각. 구석기 지도라는 게 있다면 어떨까. 그들이 걸었던 보폭과 방향을 불가능한대로 상상해본다. 저만치 걸어가면 사냥할 대상들이 춤추듯 뛰어다니고, 저 멀리 열매를 찾아 내달릴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근육과 뇌를 갖고 구석기인들은 움직였겠지. 손에 쥔 사물이 아니어도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는 지도가 있었을지 모른다. 구석기인들의 보이지 않는 지도는 그들만 아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서로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보는 지도인데 지도 속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현대 지도 속의 건물과 사물은 의인화되는 법이 없다. 사물의 특징을 드러내는 울퉁불퉁한 촉수는 거세되고 입체감은 평면이 되며, 개성은 사각형 기호들로 한 큐에 정리된다. 지도 안에서 주변 공간은 목적지를 찾기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런데 지난봄 길을 걷다가 다른 지도를 만났다. 서울 종로구 사직단 입구에 있는 사직공원 안내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연둣빛 숲을 비롯한 주변이 중심처럼 등장한다. 단군성전, 매점, 화장실, 어머니 헌장, 황학정, 종로도서관이 사생대회 나간 아마추어 화가가 포스터 물감을 묻힌 붓질로 그린 풍경화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뭐 하나도 허투루 그린 대목이 없다.
이 회화적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사실적인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이 난다. 이곳은 근엄한 장소다. 1922년 11월 문을 연 사직공원 안에는 사적 제121호인 사직단과 보물 제177호인 사직문이 있다. 1970년에 세워진 신사임당 동상, 그리고 1985년에 만든 ‘어머니 헌장비’도 있다. 그런데 안내도는 무엇이 매력인지 알고 있다. 먼저 사직공원의 별미라 할 수 있는 율곡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5번, 6번)이 빛바랜 검회색 상태로 따로 떨어져 서 있는 모자의 고독감을 담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또 요 공원에서 가장 인기인 장소는 매점(11번)이라는 것을 매점 주변에 모인 군상과 비둘기로 추정되는 붓질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한다.
지도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맞는다면 이 공원 안내도는 물감을 이용한 아날로그 솜씨로 디지털 시대에는 한참 뒤떨어진 지도다. 안내도는 오히려 조선시대 관청 소속 화가였던 화공이 숙련된 솜씨로 그려낸 고지도와 닮았다. 세계관의 반영이 느껴진다거나,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땅의 혈관이 꿈틀댄다는 식의 감동은 없다. 하지만 이 안내도는 공간에 관한 질문과 대화를 삭제하는 요즘의 잘난 지도들과 달리 필요 없는 것들을 묵살하지 않아서 좋다.
지도 만들기는 한때 반역이었다. 왕만이 알고 있는 지리적 정보를 아는 것 자체가 탐정 수사물 버금가는 추적의 결과물이었으니까. 오늘날 지도 없는 하루를 떠올리긴 어렵다. 그런데 지도 없이 여행할 수는 없을까. 한여름 여행 가기 직전에 생각한다. 지도 없이 낯선 공간에 나를 떨어뜨렸을 때 나는 길을 헤맬까.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돌아오긴 할 것이다. 지도로 가득한 세계는 어떤 면에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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