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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과거여 안녕

아이스크림 냉동고
등록 2011-07-15 18:46 수정 2020-05-03 04:26
현시원 제공

현시원 제공

아이스크림은 신기루였다. 가지고 놀다가 입안에서 사라지는 장난감이었다. 1983년 출시된 미니어처 상어 모양의 ‘죠스바’가 아니었다면 상어가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내 뇌 속에 남아 있진 않을 거다. 자두색 ‘스크류바’가 없었다면, 툭 잘라먹는 ‘쌍쌍바’가 없었다면 취향과 거리가 먼 희한한 형태의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런 아이스크림의 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도 세상 고민을 잔뜩 짊어진 표정으로 ‘쭈쭈바’를 먹고 있는 어린이를 보았으니까. 이 여름 탄력을 잃은 것은 ‘아이스크림 냉동고’라고 나는 말하겠다. 빙과류의 반짝거리는 포장지는 요란한 모습 그대로지만 냉동고는 생기를 잃은 모습이다. 독특한 풍미와 디자인의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냉동고는 요즘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뭐가 다를까. 냉동고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냉동고의 문은 열쇠로 굳게 잠긴 경우가 많다. 서른한 가지 맛이 잘 배치된 냉동고는 익숙하지만 이 맛 저 맛 마구 뒤섞인 계통 없는 냉동고 안은 낯설다. 시선을 끄는 건 냉동고의 빙과류가 아니라 ‘50% 할인’이라는 문구다. 헐값에 빙과류를 판매하는 이유는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숨통을 트고자 하는 작은 가게들의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롯데제과·해태제과 등 아이스크림 업체 영업소에서 판매점에 ‘무상’으로 제공한다. 빙과류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는 냉동고 보급률이 판매율과 직결됐던 까닭에 영업소에서는 목 좋은 슈퍼마켓에 자사 이름이 박힌 냉동고를 보급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1994년 27살의 한 청년은 경쟁업체의 냉동고만 잘 보이는 데 배치한 슈퍼를 찾아가 냉동고를 부숴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참을 길 없는, 강력한 욕망의 대상이던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지금은 과거에서 날아온 까만 ‘관’처럼 슈퍼 앞을 지킨다. L제과의 한 아이스크림 보급소는 “아이스크림을 팔아주는 슈퍼에는 지금도 무상으로 냉동고를 보급한다. 개인적 용도로 쓴다? 그러면 가로 150cm, 폭 70cm의 냉동고를 중고로 30만원에 줄 수 있다”고 했다.

한때 냉동고는 미래에서 날아온 신제품이었다. 1968년 말 냉장고의 국내 보급률은 1.5%에 머물렀고 ‘아이스박스와 얼음냉장고를 집에서 간편하게 만드는 법’이 신문에 소개되던 시절이었다. 1979년 화가 천경자는 에 기고한 ‘투명인간과 비행접시’라는 글에서 “눈부신 흰 냉장고의 모터 도는 소리는 금시 내게 감전될 것 같아” “무언지 인간 상실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한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단행본 에서 발췌). 하기야 지금도 냉동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충남 서산엔 ‘모든 얼음은 이글루’라는 이름의 아이스박스용 얼음 판매업체가 있다. 얼음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가게 이름은 무척이나 시적이다. 캐나다 퀘벡에서도 겨울에만 문을 여는 이글루 모양의 얼음 호텔이 인기를 끈다. 그런데 냉장고는 왜 하얀색 사각형 모양일까. 효용성 때문이겠지만 아무래도 인공적으로 다듬어놓은 백색 사각형의 얼음 이미지가 한몫하는 것 같다.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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