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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갇힌 야생의 위용

동물원 호랑이
등록 2011-07-01 15:50 수정 2020-05-03 04:26
현시원 제공

현시원 제공

주먹이 운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부리나케 잘 구분한다. 일등과 꼴찌를 알아보고 약한 자에게 강하게, 강한 자에겐 약하게 군다. 약함과 강함의 차별을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저항을 꿈꾼다. 그러다 때로 ‘위장’의 힘을 노린다. 강하고 무서워 보이는 이미지의 힘을 자기 치장에 활용하는 것이다. 옛날엔 가면을 쓰기도 했고 호랑이 무늬 거죽을 덮어쓰기도 했다.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가 힘의 문제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호랑이는 여전히 힘센 이미지일까? 꼬마들을 위한 1980년대 드라마 에선 단연코 그랬다.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탤런트 조경환이 ‘호랑이 선생님’ 역할을 맡아 불호령과 카리스마를 담당했다. 동물의 왕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매서운 지침은 학생들을 쥐락펴락하는 유일무이한 힘의 상징이었다. 근래에도 강렬한 눈빛에 포효하는 듯 노래한 가수 임재범이 ‘호랑이’라는 애칭을 얻은 걸 보면 호랑이는 여전히 ‘맹수’이자 ‘왕’의 면모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그런데 내 눈앞의 호랑이는 ‘종이 호랑이’ 처지다. 겉보기엔 힘셀 것 같은데 마땅히 가진 힘이 없다. 지난 5월 국립수목원에서 본 호랑이는 가히 탱탱한 무늬와 털의 윤기를 유지한 잘생긴 모습이었다. 모습이 그러했을 뿐, 동작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잃어버린 듯 용맹함이 없었다. ‘어흥’ 할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고향 시베리아 벌판처럼 디자인된 조그만 우리 안에서 하염없이 마냥 뱅뱅 걷고 있었다.

그날 호랑이의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겠으나, 야생의 출처를 기억하는 건 우리 밖의 썰렁한 안내 문구뿐이었다. 1994년 3월 중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선물한 호랑이의 일생은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10여 년간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도 후손을 잊지 못하고 벌써 장년기에 접어들었으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은 국내의 어떤 호랑이와도 비길 바가 못 된다”고 정리돼 있었다. 위인전과 실패담 사이, 호랑이의 이미지와 현실이 충돌하는 모양새는 슬펐다. 장년의 호랑이인데 ‘천지양’과 ‘백두군’으로 적혀 있었던 까닭에, 난 나보다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바로 앞에 서 있다가 순간 ‘어흥’ 하는 소리에 몹시 놀랐다. 호랑이가 동물원 구경꾼을 위해 맞춤 서비스를 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호랑이야, 어흥 안 해줘도 돼.’

우리나라에서 ‘강한 힘’의 표상이던 호랑이를 ‘놀린’ 기록도 있다. 1920년대 봄 서울 충정로 근처에 살던 한 포수는 강원도 산골에서 호랑이 새끼 두 마리를 잡아와 개 모양으로 끈을 묶어 집 마당에서 키웠다.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약이 오른 새끼 호랑이가 ‘어흥’ 하고 소리 지르면 구경꾼들이 재밌다며 환호성을 질러댔단다. 믿기 힘든 기록이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2살 난 시베리아 호랑이 암수 한 쌍이 6월23일 공개됐다. ‘호랑이 연고’로 알려진 한 연고도, 호피 무늬 원피스도, 식당 벽에 걸린 호랑이 그림의 액자도 호랑이의 지금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야생 호랑이는 사라지고 동물원에 갇힌 호랑이의 ‘이미지’만이 힘차게 소비된다.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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