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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혀는 어디로 간겨

등록 2010-04-15 17:26 수정 2020-05-03 04:26
아기의 혀는 어디로 간겨. 한겨레 고나무 기자

아기의 혀는 어디로 간겨. 한겨레 고나무 기자

는 2년 전부터 ‘하니 보케이션 베케이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보케이션 베케이션’(vocation vacation)은 몇 년 전 만들어진 미국 사이트다. 휴가 기간에 돈을 내고 직업 체험을 할 수 있다. 내가 정말 그 직업에 적성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하니 보케이션 베케이션은 이 사이트를 벤치마킹했다.

나도 이 프로그램 덕을 봤다. 지난해 여름휴가 때 여행 대신 서울 청담동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핫키친(그릴과 오븐이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스테이크의 비밀을 배웠다. 스테이크를 구울 땐 과감해야 한다. 겉은 노릇하면서 베어 무는 순간 딤섬이 터지듯 맑고 붉은 육즙을 터뜨리는 스테이크를 구우려면, 담대해야 한다. 레어로 잘 구운 스테이크의 맛을 무라카미 류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기의 혀가 입안 점막을 애무하는 것 같다.” 한여름 핫키친에서 땀띠에 시달렸다.

치이익! 지난 4월7일 미리 달군 프라이팬에 한우 안심 스테이크 100g을 올리면서 나는 이렇게 또 하릴없는 상상을 했다. 진짜 ‘하니 보케이션 베케이션’ 프로그램이 있어서 핫키친에서 요리를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서울 망원동의 독신 수컷 앞에는 그럴싸한 오븐도, 그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큰맘먹고 구입한 프라이팬이 있었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다. 판이 두꺼워 온도를 감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 위에 금속 포일을 덧씌웠다. 설거지가 귀찮았다.

나는 판이 달궈질 때 까지 인내하고 인내했다. 치이익. 100g에 8600원짜리 한우 안심을 올렸다. 고소하고 노릇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육즙이 터지는 스테이크를 구우려면 결코 오래 익혀서는 안 된다. 지금이다! 나는 뒤집기 위해 집게로 스테이크를 뒤집었다. 아뿔싸. 설거지를 피하려고 깐 포일에 스테이크가 달라붙었다. 나는 허겁지겁 다른 집게로 포일을 누르고 스테이크를 뒤집었다.

밤 10시. 내 앞에는 한 조각의 스테이크와 한 잔의 돈나푸가타 세헤라자데(이탈리아 시칠리아 와인)가 있다. 고기가 당긴 건 최근 주말섹션 ‘esc’팀에서 정치부로 발령받아 몸이 고달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이 배고팠다. 혹시 음식이나 술이 내 천직은 아닐까? 진짜로 ‘하니 보케이션 베케이션’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면 그 꿈의 허기를 조금 달랬을 텐데. 나는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슬쩍한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잘랐다. 눈을 감고 입에 넣었다. 아기의 혀가 입안을 애무하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대신 누가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같았다. 때로 맛은 혀가 아니라 가슴이나 머리로 느낀다는 어느 요리사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요리사용 온도계와 오븐이 없어도, 다음번엔 아기의 혀가 애무하는 것 같은 스테이크를 구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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