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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김수미도 따라한다

홍제동 김수미
등록 2010-03-24 15:30 수정 2020-05-03 04:26
〈스타킹〉. SBS 제공

〈스타킹〉. SBS 제공

“일용아. 너 이 자식 여기서 뭐하고 자빠져 있냐?” 이 목소리만 들으면 쳐다볼 것도 없다. 거기에 누가 서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코흘리개나 속세와 인연을 끊은 스님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의심해야 한다. 거기에 반드시 김수미 여사가 서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에 몸뻬바지에 가발을 쓴 건축과 대학생이 멀쩡한 얼굴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명 하여 ‘홍제동 김수미’다.

나는 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풋풋한 아마추어들이 보여주는 생기발랄한 재간이야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은 너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버렸다. 출연자들의 상당수는 순수 아마추어라기보다는 홍보차 나온 국내외 공연팀이고, 재주를 선보이는 아이들은 너무 되바라져 불편할 때가 적지 않고, 십수 명의 연예인 패널은 출연자를 제쳐두고 자기들 장기를 내보이기에 바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실망감을 단번에 씻어주는 통쾌한 한 방이었다.

이제 유명인 성대모사 한두 개 정도는 연예인들의 필수 스펙이다. 가끔 인간 복사기라 불리는 쟁쟁한 개그맨들의 배틀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만큼 압도적인 경우를 본 적은 없다. ‘홍제동 김수미’는 목소리는 물론, 행동거지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원본의 엑기스를 뽑아내왔다. 더욱 대단한 것은 쟁쟁한 연예인 출연자들을 장악해버린 놀라운 카리스마였다. 등장하면서부터 대선배가 나오는데 자리에 앉아 있다고 호통을 치고, 태진아에게 “옷 좀 센스 입게 입으세요. 오늘은 빨간색, 오늘은 초록색, 오늘은 노란색. 무슨 사마귀예요?”라며 한 방을 먹인다. 능청스러움은 절묘한 연기력과 어우러져 좌중을 압도해버렸다.

드디어 스튜디오에는 귀한 얼굴인 진짜 김수미가 등장했다. 보통 이 정도가 되면 “선배님 제가 흉내 내서 마음 상하지 않으셨어요?” 하며 뒤로 발을 빼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 김수미가 누군가. 새파란 시절부터 국민 할머니인 일용 엄니였고, 영화 속에서는 호통 소리로 조폭들을 절절 기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홍제동 김수미’는 ‘원조 김수미’를 만나자 더욱 물을 만난 듯 까분다. 원조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한다. 김수미 성대모사법을 특강하며 ‘우’하고 ‘아’를 강조해서 “구루니까아~”라고 해보라니까, 진짜가 가짜의 발성법을 따라하며 배우고 있다.

이 친구가 진짜 걸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온갖 상황에 전혀 기죽지 않고 애드리브로 맞받아치는 배짱과 순발력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김수미 벨소리’를 올렸다니까, 원조가 “그거 돈은 자기가 다 가져?”라고 따진다. 그러자 “돈 안 받아요.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싱글거리며 타이른다. 김수미가 “이 염병할 놈아!” 하며 제대로 전라도 욕 연기를 보여주는데,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이 화통함, 이 대범함, 이 뻔뻔함… 정말 대단하다. 심지어 정리까지 깨끗하게 해냈다. 강호동도 필요 없었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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