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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차두리가 나간다!

2010 월드컵, 골 대신 웃음 빵빵
등록 2010-07-07 15:21 수정 2020-05-03 04:26
로봇 차두리가 나간다!

로봇 차두리가 나간다!

한여름 밤에는 불꽃놀이를 한다. 그러나 4년에 한 번은 공놀이를 한다. ‘언저리 타임’은 어느 언저리에서 생기는지, 무슨 짓을 해야 오프사이드가 되는지는 몰라도 된다. 남자친구의 군대 축구 이야기에 하품만 하던 그녀들도 빨간 옷을 찢고 거리로 나온다. 월드컵은 골이 터져야 보는 맛이 나는데, 이상하게 골은 안 터져도 웃음이 빵빵 터지기도 한다. 월드컵이 만들어낸 코미디, 내 맘대로 순위를 매겨본다.

먼저 예선 탈락급에 해당되는 잔챙이들이 있다. 각종 기획성 응원녀들은 쓴웃음만 나게 했다. 특히 ‘똥습 여사’의 패션은 워스트 중의 워스트로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매번 소녀들을 들뜨게 했던 꽃미남 축구 선수들의 계보도 올해는 영 엉망이었다. 그나마 꽃중년 요아힘 뢰프 감독이 팬몰이를 했는데, 곧 유명세가 망신살로 이어졌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만진 손을 코에 가져간다든지, 콧구멍에 넣었던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든지 하는 플레이가 방송을 타면서 제대로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다음은 16강 통과 정도로 평가되는 코미디들. ‘허안나 신음 동영상’으로 알려진 개콘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 팀의 응원 동영상은 주목도는 높았지만 디테일이 약했다. 나름 골대까지 잘 몰고 갔지만 결정타가 부족했다고 할까. 가슴 털을 밀고 나와서 아무런 활약도 못한 루니의 삼손설, 결정적 슛으로 한국의 8강 꿈을 좌절시킨 우루과이의 수아레스가 경기 끝난 뒤 깡충깡충 뛰어와 캡틴 박의 유니폼을 바꿔간 모습은 아이디어와 신선미가 좋았다.

월드컵 코미디 8강 정도가 되니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졌다. “한국이 16강 진출하면 ○○○하겠다”고 선언한 여러 연예인의 공약 실천은 아주 재미있었다. 최화정은 라디오 방송에 비키니로 출연했고, 김흥국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코털을 자르는 ‘삭털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리스 팀의 잔디남 카추라니스, 아이폰의 부부젤라 어플 등도 한동안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4강 진출자 중 하나는 스페인의 사비. 온두라스와의 대결에서 골대 앞에서 노마크로 날아오는 크로스에 머리를 갖다대봤지만 키가 살짝 모자라는 아쉬움. 이것을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는 화면에 ‘키컸으면’이라고 이름 붙인 재치가 멋졌다. 짧지만 강렬한 플레이는 코트디브아르의 에부에. 북한 코치의 지시를 너무나 진지하게 엿듣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배꼽을 잡아뺐다.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가 동티모르 말고 또 있었나 보다.

준우승은 사실 영광의 자리가 아니다. 유난히 말 많고 탈 많던 심판들의 판정. 골대 안으로 한참 들어간 공은 노골이라 하고, 손으로 공을 굴렸는데 핸드볼이 아니라 하고, 오프사이드 룰은 존재 의미를 의심하게 했다. 그 터무니없는 상황이 실소를 자아낸다. 그러니까 영광의 우승은 ‘차두리 로봇설’. 한-일 평가전에서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을 얻은 뒤 끝없이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간 그 유머 덕분에 밤샘 응원이 더욱 재미있어졌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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